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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하라(하승우)

세상을 살다보면 참 공교롭게도 묘하게 일이 겹칠 때가 있습니다. 어제 간만에 각시의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씨네큐브에 갔는데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라는 두 개의 영화를 놓고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둘 다 나름 재미있어 보였거든요. 그러다 더 리더를 보기로 했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를 그동안 재미있게 봤었거든요.


빌리 엘리어트, 말이 필요없는 영화였죠. 경쾌한 춤과 음악이 이어지면서도 당시 영국 광부들의 파업을 잘 담아냈던...





디 아워스는 선배들과 함께 봤는데, '디 아더스'라는 공포영화의 속편인 줄 알고, 공포영화 싫다고 했다가 핀잔을 들었다는...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제 우리 각시도 똑같이 공포영화라고 말했다는...(ㅎㅎㅎ 역시 천생연분이군요)







하여간 '러 리더'를 봤는데, 멜로 영화일 줄 알았던 영화가 나름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더군요(그런게 달드리 감독의 특기이기는 하지만). 더구나 최근 인권연구소 창에서 진행하고 있는 아렌트 세미나와 완전히 겹쳐버렸어요.

길에서 구토를 하는 소년을 돌봐줄 정도로 정이 많은 여인 한나, 어린 소년의 호기심으로 그 여인에게 빠져들었던 15살 소년 마이클의 얘기가 영화 전반부를 차지합니다. 어린 마이클은 한나와의 섹스에 빠졌고,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는 마이클이 읽어주는 책의 세상에 빠져듭니다. 그러다 한나는 마이클을 그 또래들의 세계로 돌려주기 위해 짐을 싸서 떠나죠.

그렇게 헤어진 뒤 마이클은 법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고, 한나는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되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전범재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한나는 자신이 감시하던 유대인 300명을 살해한 혐의(폭탄이 떨어져 불타는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군 혐의)를 받습니다. 그 지옥에서 탈출한 한 여인이 책을 쓰면서 그 책에 언급된 6명의 독일인이 재판을 받는데 그 중 1명이 한나죠. 여차저차해서 한나가 6명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는데, 한나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밝히기 싫어 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지요.

그런데 재판에서 한나가 자신에 관해 얘기한 내용은 아우슈비츠의 소장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얘기했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매일 수용소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누군가를 정해서 아우슈비츠로 보내야만 했다. 나의 임무는 유대인들을 감시하는 것인데, 문을 열어줬을 경우 그들을 감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문을 열어줄 수 없었다. 함께 지내는 동안은 그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한나는 자신의 임무를 넘어서는 행위를 선택하지는 않았지요.

아렌트가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가서 취재했던 전범재판에서 아이히만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합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당시 나치의 법률 하에서는 전혀 범죄가 아닌 일을 했고, 공무원으로서 자신이 시킨 일을 '성실히' 했을 뿐이라고 얘기합니다. 아이히만이 심문을 받는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그가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가 죽게 되는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을 받았더라도 그대로 수행했으리라는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이 광경을 보면서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사람에게서 생각과 판단의 능력을 빼앗아가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사건을 불러오는가를 말하려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정답같은 얘기이죠. 하지만 저는 달드리 감독과 아렌트의 의도는 이런 정답을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달드리 감독의 시각을 볼까요? 영화에서 한나는 자기 죄를 피하려 했던 나머지 5명과 달리 그때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한나가 얘기하지 않은 건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점 뿐입니다.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에 한나는 무기징역형을 당하게 되죠.

그리고 그 점을 알고 있는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을 버리고 떠난 한나에 대한 원망이든, 한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분노이든, 마이클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한나를 버렸던 거죠. 그리고 당시 독일 곳곳에 서 있던 수용소를 이미 알고 있었고 수용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알고 있던 독일인들도 한나를 처벌하면서, 또는 한나와 자신을 구분하면서 모든 죄를 덮어버립니다. 최소한 한나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얘기하고 그에 관해 생각할 양심을 가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덮어버리는 데에만 급급했죠.

그리고 한나는 재판을 하는 판사에게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때 어떻게 했을 거냐고? 판사는 답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혼자 힘으론 그런 결정을 반대하지 못했을 것이니까요. 그런 결정을 막기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조직하고 집단적으로 행위할까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으니까요. 누구라도 한나의 위치에 가게 되었을 때 한나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특히 읽고 쓸 수 없는 사람이 그런 결정을 반대할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때로는 양심이 뒤늦게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마이클은 양심(또는 사랑?)을 이기지 못해 이혼을 하고 책을 녹음해서 교도소의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합니다. 한나는 그것을 통해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마이클과 소통을 시도합니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한나는 삶의 활력을 찾기 시작하고 그러다 결국 가석방 허가를 받게 되죠. 가석방을 앞두고 교도소를 찾아온 마이클은 한나를 위해 일자리와 집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나는 목을 매어 자살을 택합니다(왜 자살을 택했는지는 영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저는 '상처'였다고 봅니다). 한나가 남긴 돈은 유대인 문맹퇴치기금에 한나의 이름으로 기부됩니다.

모두가 홀로코스트를 끔찍한 사건이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끔찍하기에 그 누구도 수용소에 관해 기억하려 하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그런 일이 있었지라며 씁쓸히 말할 뿐이죠. 하지만 기억되지 않는 사건은 마술처럼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이제 젊은 딸을 둔 아버지로 늙어버린 마이클이 딸에게 아버지의 삶을 얘기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납니다. 어쩌면 이 '소통'이 달드리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지 모르겠네요.모두가 공범으로 변해버린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과거를 얘기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그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얘기하는 것만이 끔찍한 홀로코스트를 막는 방법일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마치 소크라테스의 재판 얘기처럼 한국사회에 잘못 전달되고 있는 듯합니다. 보통 이 책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관한 보고서라고 얘기합니다. 사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는 책의 맨 마지막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아이히만은 재판이 끝난 뒤 아주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데요, 아렌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잠깐 판단을 미루고요, 제가 보기에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얘기를 건네고 싶어하는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보며 이 재판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보다는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죄를 물을지에 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사건의 원인을 캐지 않고 그 사건을 덮어버리기 위해 세계적인 쇼를 벌인 셈이죠. 그러니 무능력, 즉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무능력함이 과연 아이히만만의 문제였을까요?

더구나 아렌트는 당시 유대인 공동체의 상류층들이 자기 민족들을 어떻게 배반했는지도 얘기한다.

행정과 경찰 업무에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던 일은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적으로 유대인 경찰에 의한 것이었음) 완전한 혼돈상태에 빠졌거나 독일의 인력 공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희생자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욱이 대부분 사무실에서 일하던 그들이 수십만 명의 타인들을 절멸시키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대인 공동체를 국가와 분리된 게토로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켰던 유명한 유대인들([전체주의의 기원] 1권에서 얘기되는)은 유대인들을 지옥의 입구로 몰아갔습니다. 이런 상층 유대인들의 배신은 '구원'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면 헝가리에서 카스트너 박사는 대략 47만 6,000명의 희생자를 내고 정확히 1,684명을 구출했다. ‘맹목적인 운명’에 따라 선별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진정으로 신성한 원칙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서류에 써서 그로 인해 그들의 삶과 죽음이 나뉘는 연약한 인간의 손을 인도할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런데 이러한 ‘신성한 원칙들’은 누구를 구원으로 이끌어 냈는가? ‘지부르[공동체]를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한’ 사람들(즉 지도층 인사들)과 ‘아주 저명한 유대인’이라고 카스트너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열심히 팔아서, 불쌍한 유대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세상의 지지를 받지요. 그러니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요? 물론 살아남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이 무시되어야 하는 건 아니죠. 영화에 잠시 비치듯이 어느 누구도 실감할 수 없을 만큼 그 고통이 컸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쁘리모 레비나 서경식의 글이나 솔제비친의 소설에서 엿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고통스럽고 아팠다고 해서 모든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죠. 아렌트는 아마도 그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고 난 뒤에 유대인 공동체들의 적이 됩니다.

아렌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비유합니다. 예수의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압력에 못이겨 예수를 처형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처형이 끝난 뒤 손을 씻으며 나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본디오 빌라도는 누구일까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선한 사람을 자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화를 보며, 아렌트의 글을 읽으며 저는 가끔 91년 5월의 기억을 떠올리곤 합니다. 죽어간 사람들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희망의 말을 남깁니다.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인간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인간은 신이 용서해주기 때문에 자신도 ‘신과 같이’ 남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을 용서할 때만’ 신도 ‘그와 같이’ 인간을 용서해준다고 가르치고 있다. 용서의 의무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자기의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시작하겠다는 부단한 의지를 통해서만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용서는 보복의 정반대이다.


신은 인간에게 용서하는 힘을 줬다고 합니다. 한나처럼 누구라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고통을 겪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을 무조건 용서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렌트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라는 집단적인 고백이 실제로는 그 죄를 은폐하고 방어하기 위한 변명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아렌트의 제자인 베이너의 말처럼 "아렌트에게 용서는 판단에 뒤따르는 것이지 판단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아렌트는 용서야말로 아주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용서는 남을 위해 내가 베푸는 자비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환원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행위의 결과를 인정하는 능동적인 행위이니까요(때로는 그것이 자신에게 너무 고통스러울수도 있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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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의 평범성 : 희생양 제의 뒤 추악함들에 대한 묘사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2006

    Tracked from Fly, Hendrix, Fly 2009/07/07 14:46 Delete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한길사 PD저널 헨드릭스의 책읽기 2009년 7월 4일 지행네트워크의 예사인(예술, 사상-사회, 인문) 세미나의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한길 그레이트스트 북스에서 나온 책을 완독했다. 책은 손의 질감과 눈으로 느끼는 두께보다 훨씬 빽빽했다. 다른 사회과학서를 읽을 때 보통 시간당 100페이지를 읽는 데, 이 책은 시간당 30페이지 읽기가 쉽지 않..

  2. 대중이 무기력한 이유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2006

    Tracked from Fly, Hendrix, Fly 2009/07/24 15:36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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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1tree 2009/03/29 23:37 # M/D Reply Permalink

    보복의 정반대.. 살다보면 내가 해온대로 남이 했던 대로 살아갑니다.. 이걸 넘어서는 삶을 살고싶어요..

    1. 대마왕 2009/03/30 09:36 # M/D Permalink

      소통과 새로운 만남이 그런 가능성을 열어주지 않을까요? 인생에 모범답안은 없으니 계속 말을 걸고 새롭게 행동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삶이 나올지도... 저도 자신은 없지만요.^^;;

  2. 은휘 2009/03/31 16:38 # M/D Reply Permalink

    종일 머릿속이 복잡하네요... 인간임을 잃지 않는 것, 정의를 실현하는 것, 사랑으로 지켜주는 것, 결국 용서할 수 있는 것... 그래서 희망을 놓지 않는!

    1. 대마왕 2009/04/06 11:14 # M/D Permalink

      세상이 복잡하니 머릿속도 복잡할 수밖에요.^^;; 그래도 우리가 사는 건 사랑과 우정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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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구소 창'이 주관하는 철학과 인권 세미나(http://www.khrrc.org/index.php)에 참여하며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글을 다시 읽고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으로 1, 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었고,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말, 70년대 초의 정치상황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렌트가 말한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라는 개념이 현대적인 인권 개념의 재구성과 관련해 주목을 받고 있다.


아렌트가 인권을 자기 철학의 핵심주제로 다루지는 않았지만(아렌트는 인권보다 시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지오르지오 아감벤이 아렌트의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자기 얘기를 꺼내면서 아렌트의 사상이 자연스레 인권의 주제로 옮겨진 듯하다. 그런데 아렌트의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렌트의 사상 전체를 살피고 그 속에서 인권개념을 논의하는 자연스런 과정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래서 인권활동가나 인권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렌트의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그 개념의 흔적을 찾아보는 세미나를 하고 있다.

그와 관련해 아렌트가 쓴 [공화국의 위기]를 읽고 있다. 이 책은 60, 70년대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글인데, 현재 우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시민불복종'이라는 글에서 아렌트는 당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과 흑인민권운동을 벌이던 시민불복종운동을 다룬다. 아렌트는 어떤 정치적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소통되며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정치라 보고 그런 소통과 관계의 장을 보장하는 것을 권력의 역할이라 봤다.

아렌트는 어떤 사안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을 경계하는데, 가령 양심적 병역거부는 법을 어기는 행위의 정당성을 개인의 양심에서 찾기 때문에 정치적인 사안을 비정치적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다보니 어떤 개인의 양심과 다른 개인의 양심이 충돌할 때(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흑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킹 목사의 양심과 미시시피의 인종주의자의 양심이 충돌할 때), 그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기 어렵다. 더구나 그런 양심이 정당화되려면 그 사람이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날 수 없다. 이런 점 때문에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봤고 그 근거를 양심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에서 찾기를 바랬다.

양심적인 거부자와는 달리 불복종 시민은 한 집단의 성원이며 싫든 좋든 이 집단은 자발적 결사를 이루는 것과 같은 정신에 따라 형성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논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우리가 개인들―그들은 자신을 주관적이며 양심에 따라 사회의 습관과 법에 도전한다―을 다루고 있다는 가정이다.


아렌트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시민불복종을 구분하면서 시민불복종을 중요한 정치행위로 바라본다. 왜냐하면

불복종 시민의 실상은 조직된 소수집단이며, 공동이익이라기보다는 공동의견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고, 정부의 정책이 다수에 의해 지지받을 것을 알 경우라도 그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서리라는 결의를 갖는다.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그들의 일치된 의견에서 나온다.
시민불복종은 자신의 행위가 현재의 법질서를 해치거나 다수의 상식과 반대될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여러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정치행위이다. 특히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법질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거나 정부가 적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음모를 꾸밀 때에, 시민불복종은 변화를 이룰 유일한 수단이다. 아렌트는 당시 미국사회가 이런 상태(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정보기관이 은밀히 활약하는)였다고 보고 시민불복종 행위를 미국의 건국행위만큼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미국의 건국행위란 따져보면 식민지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시민불복종은 공개적으로 법에 도전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를 가진다. 사회가 유지되고 정치가 이루어지려면 그 경계를 짓는 법이 필요한데, 시민불복종은 그 법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렌트는 법조문보다 법의 정신이 중요하고 준법정신이 입법자의 태도를 가질 때, 즉 내가 곧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자 스스로 그 법에 복종하는 사람(인민주권이라고 해야 할까)일 때 가능하기 때문에 시민불복종이 정당하다고 본다. 특히 새롭게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합의하지 않은 그 사회의 질서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불복종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렌트는 그런 불복종이 약속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행동이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간의 합의와 약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민은 불복종을 하는 만큼 자신이 시민으로서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하는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은 시민불복종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법률가들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법률가들은 이런 시민공동체의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을 개인의 범죄행위로 다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복종 시민을 한 집단의 성원으로 인정하기보다는 법정에서 피고가 될 개인적 범법자로 간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정의의 할당에는 관심을 가지면서 다른 모든 것―피고는 다른 자들과 함께 뜻을 하며 법정에서 그를 진술하려 한다는 여론이나 시대정신(Zeitgeist)―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재판절차의 위풍이다.
법은 법에 대한 불복종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의 권리가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 권리(결사의 권리)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정치제도는 불복종하는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유로이 단체를 만들도록 보장해야 한다. 아렌트는 로비스트들이 정부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시민불복종하는 단체들이 압력단체를 만들어 정부를 압박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 제 1조가 보장하는 결사의 권리가 현실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지금 한국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이 사회가 정상적인 방식으로는(요즘은 이런 방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주장을 더이상 받아주지 않는다고 여긴 시민들이 곳곳에서 촛불을 들고 저항하고 있다. 정부는 이 저항을 법으로 가로막으려 하지만 아렌트가 얘기하듯 촛불시민들의 불복종 행위에 대한 판단은 법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정치행위는 기존의 정치질서가 가진 문제점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시민들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정치위기는 아주 심각하다.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들을 자꾸 법원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려 하는데, 그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그 의제를 사회와 소통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려 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절하지 않은 기관이다. 그리고 그 사법적인 판단의 잣대는 이미 낡은 것으로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규정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의 사법계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충원되지도 않고 그 작동과정 역시 민주적이지 않다(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판결에 개입하기도 하니).

아마도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정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게 뻔하다. 시민불복종의 권리는 짓밟히고 그와 함께 결사의 권리,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단체를 자유로이 만들 권리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어쩌면 이제 저항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으로 진행되어야 할지 모른다. 권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 저항은 건국행위 수준의 정치행위를 지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단순히 법에 복종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사람들이 맺을 새로운 약속, 새로운 결사들을 만들며, 그들의 국가를 버리고 우리들의 공동체를 조금씩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폭력 불복종의 정신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터져나와야 한다.

이제 개인으로 흩어지지 말고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정치행위는 국가가 보장하는 시민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응당 누려야 할 근본적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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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진보개혁의 위기, 이명박 정권의 등장, 촛불시위, 경제위기...민주화 20년을 경과하면서 최근 우리들이 '체험'하고있는 정치사회적 현상들입니다. 그 현상들의 핵심에 놓여져있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번 비평은 바로 그러한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사색을 최근 한국에 소개된 랑시에르의 텍스트를 통해 전개해본 것입니다.  필자(김정한 연구위원)는 랑시에르의 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색의 길을 개쳑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즉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통치양식이나 정치체계가 아니라, 기존 사회 질서와 단절하고 새로운 공동체(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삶의 양식이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주체가 구성되는 주체화양식"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얼마나 민주주의에 대한 그간의 논의에 있어서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는 향후의 논쟁과 같은 집단적-상호소통적 지적 행위를 통해 살펴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랑시에르의 논의에서 민주화 이후 우리가 민주주의를 우리의 삶과 괴리된 그 무엇으로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니었는지 곰곰히 사유하게끔 만드는, 그래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단지 체험이 아니라 인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하는 하나의 계기를 찾을 수 있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일독과 토론의 제기를 기대합니다.    
 
 
* * * * *
 
 
‘불화의 정치’와 그에 대한 비판
 
김정한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지난주에 자크 랑시에르가 다녀갔지만, 나는 독감으로 두문불출하느라 그를 대면하지 못했다. 마침 10월 말에 <텍스트>의 청탁으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에 대한 서평을 써둔 터라 몇 가지 질문꺼리도 있었는데,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 대신 <무지한 스승>이 그의 방한 강연에 맞춰 출간되었으니 당분간 이 책을 읽으며 그의 답변을 상상이나 해봐야겠다. <텍스트>의 양해를 얻어 서평의 일부를 소개한다.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식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꿈처럼 그리던 시절이 지나간 후, 국내에서 민주주의는 거의 ‘죽은 언어’에 가까워진 것이 사실이다. 사회 변화를 향한 열정을 끌어내기는커녕,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적극적인 저항조차 민주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묵살되는 상황이 다반사이다. 여기에는 형식적 민주주의(정치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구분하고, 전자를 지키면서 후자를 심화해야 한다는 판에 박힌 민주주의 담론들도 한몫한다. 민주주의는 실천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진부해지는 중이다. 최근 국내에서 랑시에르가 새삼 주목받는 이유도 어쩌면 그가 민주주의를 통해 저항을 사유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랑시에르는 노동자들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흔히 지식인들은 평등을 선언하는 법과 불평등한 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법 앞의 평등은 불평등한 현실을 은폐하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당한 노동조건이 법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고 논리적으로 지적하고, 법에 맞게 불평등한 노동조건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문장을 입증하기 위해 파업을 전개한다. 이것이 1830년 프랑스혁명 직후 노동자들이 사고하고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랑시에르는 이를 ‘해방의 삼단논법’이라고 지칭한다. 대전제(법 앞의 평등)와 소전제(불평등한 현실)를 경험하면서 노동자들은 대전제에 맞게 소전제를 바꿔서 대전제를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평등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이며, 행위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한다. 해방이란 평등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 능력을 통해 스스로 입증하는 실천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적 삶(vita democratica)이다. 여기서 ‘삶’이라고 표현하듯이,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통치양식이나 정치체계가 아니라, 기존 사회 질서와 단절하고 새로운 공동체(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삶의 양식이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주체가 구성되는 주체화양식이다.
 
치안과 정치의 불화
 
이렇게 한쪽에 기존 사회 질서가 있고, 다른 쪽에 민주주의가 있다. 이런 기본적인 이분법은 랑시에르 철학의 주요 개념들에서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우선 한쪽에 치안(police)이 있고, 다른 쪽에 정치(la politique)가 있다. 치안은 사회 질서를 조직하고 자리와 기능을 위계적으로 분배하는 통치과정이고, 정치는 평등 전제와 이를 입증하는 평등과정이다(따라서 정치와 민주주의는 동의어이다). 치안은 평등을 방해하고 정치는 치안을 방해한다.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은 치안과 정치, 통치과정과 평등과정이 마주치는 무대이며,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는 이 무대의 경계이다. 치안은 통치원리(archē)에 따라 사회 질서를 구성하지만, 정치는 치안 질서에 끊임없이 침입하고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를 구성한다.
 
또한 한쪽에 군중(ochlos)이 있고, 다른 쪽에 인민(demos)이 있다. 군중이 지배 논리에 갇혀 있는 정념에 빠진 개인들의 결집이라면, 인민은 지배 논리와 단절하는 민주주의의 주체이다. 군중은 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합의에 집착하고, 인민은 그것에 침입하여 군중을 분할하는 불화(mésentente)를 추구한다. 치안은 통치할 자격이 없는 인민을 셈에서 배제하고 몫을 나눠주지 않지만(따라서 인민은 치안 질서의 예외, 공백, 텅빈 요소이다), 평등을 전제하는 인민은 몫이 없는 자로서 자신의 몫을 단언하고 셈해질 자격이 없는 자로서 자격을 주장한다.
 
따라서 인민은 빈민이나 하층민과 같은 사회학적 범주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불안정하게 출현하고 소멸하는 정치적 주체이다. 정치적 주체의 구성은 타자가 치안 논리로 고착시킨 동일성(identity)을 거부하고, 듣지 않는 타자를 향해 말하지 않아야 하는 자로서 말을 걸며, 셈 바깥으로 배제된 추방자와 스스로 동일시하는, 동일시할 수 없는 타자(‘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와 동일시하는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 이와 동시에 정치적 주체화는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 체계(감각적인 것의 나눔)를 변화시킨다.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나누고 배제하는 치안 원리에 맞서, 그런 감각적인 것들을 새롭게 배분하고 배치한다. 이는 기존 세계에서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들리도록 하고 보이도록 하는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여기서 정치와 미학이 겹쳐지며,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두 가지 방식, 치안과 정치의 대립 및 불화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이룬다.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의 비판 - 발리바르, 지젝, 라클라우
 
이제 막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랑시에르 철학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랑시에르와 일정하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포스트알튀세르주의자들(지젝이 규정하듯이, 알튀세르와 거리를 두면서도 알튀세르를 참조한다는 의미에서)이 어떤 논점을 제기하고 있는지 간략히 확인하고 넘어갈 필요는 있겠다. 이는 랑시에르를 이해하는 데에도 우회적으로 도움을 줄 것이다.
 
먼저, 발리바르는 랑시에르가 정립한 불화의 정치가 해방의 정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모델이라고 평가하지만, 몫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할 때 그들이 과연 보편성(“시민적 인류의 잠재적 전체”)을 담지할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한다(<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 36-37쪽).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들의 투쟁은 이미 선언된 권리에서 배제된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관계(“보편적 희생자의 파토스”)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편적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데 곤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가 동일노동·동일임금을 주장할 때, 그리고 여성이 성평등을 단언할 때, 비정규직 노동자와 여성 가운데 어느 쪽도 몫이 없는 자들 전체를 대표하기는 쉽지 않다.
 
다음, 지젝은 랑시에르가 어떻게 저항하기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견실한 개념화를 제시하고 있지만(<감성의 분할>, 도서출판 b, 2008, 114쪽), 치안과 정치의 불화를 통해 과연 치안 질서를 궁극적으로 전복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까다로운 주체>, 도서출판 b, 383-391쪽). 치안 질서를 방해하는 몫이 없는 자들의 활동은 치안 질서를 늘 그곳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으며, 치안과 정치를 대립시켜 치안 질서를 향해 끊임없이 불가능한 요구를 제기하는 일은 결국 ‘치안 질서에 내속하는 정치’를 떠맡아 실행하려 하지 않는 태도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스스로 주인이 되는 대신 주인을 향해 히스테리적으로 도발하는 데 머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은 치안 질서를 전복시켜 새로운 실정적 질서로 전환시키는 활동에 대해 어떤 두려움(‘원-전체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꼬기도 한다(실제로 랑시에르는 “우리는 원하는 만큼 개인들을 해방시킬 수 있지만, 결코 한 사회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180-181쪽)고 말한다). 진정한 전복적 활동은 사회 체계를 운영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지젝이 국가를 운영하는 부담스런 과제를 기꺼이 떠맡은 레닌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라클라우는 랑시에르의 분석이 자신의 급진민주주의 전략에 상당히 근접한다고 평가한다(Populist Reason, Verso, 2005, 245-248). 셈할 수 없는 것이 셈하는 원리 자체에 파열을 내는 랑시에르의 개념화는 한 부분(특수성)이 전체(보편성)로서 기능하는 자신의 헤게모니 논리와 유사하며, 특수한 투쟁이 자신의 특수성을 초월하는 상징적 의미와 결부될 때 보편적으로 기능하는 과정을 예리하게 지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클라우는 인민이 과연 진보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구성될 것인지는 선험적으로 보증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담론 형식은 본래 비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랑시에르가 정치의 가능성을 해방정치의 가능성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고, 그것이 파시즘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렇게 제기되고 있는 쟁점들이 과연 랑시에르의 철학에 비춰볼 때 얼마나 타당한지 여부도 차후 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랑시에르를 읽어야 할 이유가 더 추가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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