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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성 2호’ 발사가 북한사회에서 의미하는 것들

- 북한 문학을 통해 읽은 북한사회의 최근 동향


오창은(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토끼연구소’에 쏟아 부은 열정


북한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은 한 여인의 회상에서 시작된다. 이 여인(미연)은 셋째 아들을 과학자로 키워냈다. 아들은 자신만만한 패기로 넘쳐나고,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미연은 이를 대견해 하면서도, ‘은근한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그 불안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소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리준성에 대한 미연의 회고가 겹쳐진다. 리준성과 정미연은 대학 학과경연대회에서 나란히 1등을 한 사이였다. 특히, 준성은 ‘현미경연구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희망과 정열’이 넘쳐 있었다. 그런데, 촉망받던 준성이 갑자기 연구소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지방에 있는 ‘토끼연구소’에서 새로운 연구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미연은 ‘이미 토대를 닦은 이곳을 떠나 새 출발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라며 만류한다. 이 부분에서 북한사회에서도 ‘평양’의 특권적 지위가 얼마나 강한가를 확인할 수 있다. 젊은 세대는 가급적 평양에 남으려고 하고, 지방으로 가면 주류에서 밀린다는 강한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준성은 막무가내로 지방에 있는 ‘토끼연구소’로 떠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아직 가정이 없고 이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은 내가 가는게 제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더불어 준성은 “나야 아직 연구분야를 바꾸어도 다시 내달릴 여유가 있지만 나이 많은 연구사들에겐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고려도 포함된다. 일종의 자기 희생이 준성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준성은 지방의 이름 없는 연구사로 연구에 몰두하러 떠난다. 3년후, 미연이 준성을 다시 만난 것은 내각에서 소집한 ‘긴급협의회’에서였다. ‘××닭공장에서 터진 《ㄱ》전염병’으로 인해 속수무책일 때, 준성이 또 다시 결단성을 보인다. 그는 ‘비록 토끼와 말 밖에 다루어보지 못했’지만, “배워서라도 예방약을 만들겠다”고 주장해 다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준성의 연구는 성공했고 닭 전염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 그 준성이 바로 과학자로 성공한 셋째 아들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미연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밝힌다.

이 소설은 《조선문학》 2008년 8월호에 실린 배경휘의 「세월의 물음 앞에」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셋째 아들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시작되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준성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는 기법을 활용했다. 이 소설은 지금의 북한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현실과 열망’을 확인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강성대국건설과 광명성 2호


1998년 8월 22일자 《로동신문》에 정론 「강성대국」에 관한 글이 실리면서, 북한문학은 ‘과학(환상)소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른바 ‘강성대국건설’과 ‘과학소설’의 비중 강화는 북한사회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4월 5일 발사한 로켓(은하-2호)와 인공위성(광명성 2호)은 북한사회의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쳐 인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주창해온 ‘강성대국건설’이 인공위성을 통해 그 열매를 맺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한을 포함한 주변국에서는 그 의미를 폄하하기에 여념이 없다. 4월 5일, 실제로 발사가 이뤄지기 전까지 인공위성 발사를 미사일 발사로 지칭했다. 어떤 의미에서 로켓과 인공위성 발사는 북한정권의 이중적인 포석이었다.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과학적 성과를 증명하는 것, 이를 통해 북한 체제의 실제적 힘을 과시하는 것이 목표였다.

북한은 <로동신문> 2009년 4월 6일자 1면 사설을 통해 ‘강성대국건설에서 승리의 첫 포성을 울린 위대한 력사적 사변’으로 인공 위성 발사에 의미부여를 했다. 4월 9일자 <로동신문>을 통해서는 ‘인공지구위성 광명성2호의 성과적 발사를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가 10만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8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되었다’고 보도했다. 뿐만 아니라, 4월 17일에는 평안남도, 황해남도, 황해북도, 강원도, 함경북도, 량강도에서 군중대회가 개최되었고, 4월 19일에는 시, 군 단위에서 군중대회가 인공위성발사를 축하하는 군중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북한은 이번 광명성2호 인공위성 발사를 내부 결속의 중요한 계기로 삼고 있다. <로동신문> 2009년 4월 20일자 1면에 따르면, 북한은 대규모 군중집회를 통해 그간 담론으로만 존재해 왔던 ‘강성대국건설’이 ‘광명성 2호’로 실체화되었음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반면 이를 받아들이는 남한 정부의 태도는 너무 민감하고 적대적이어서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남한에서 이번 인공위성 발사를 계기로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전면 참여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남북관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한 정부의 입장은 북한의 ‘광명성 2호’를 인공위성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는 결국 북한을 주권국가로 대하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긍정적 개선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북한 사회가 ‘광명성 2호’ 발사를 자축하는 축제분위기인데, 남한 사회는 전쟁이 임박한 듯한 위기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제반 분야의 협력, 교류 활성화를 통한 서로의 신뢰 회복’에 대해 그 의미를 다시 되새겼으면 한다. 현재의 북한 사회는 ‘강성대국건설’ 담론을 ‘광명성 2호’ 발사를 통해 실체화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남한에서 나서서 이를 남북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사건으로 만들고 있어 우려스럽다. 실제로 북한은 남한의 PSI 전면 참여에 대해 ‘노골적인 대결포고, 선전포고’라고 반발하고 있다. <민주조선> 2009년 4월 19일자 3면에 따르면, 북한은 남한의 PSI 전면 참여 논의가 ‘6자회담 합의에 구속되지 않고 핵억제력을 포함한 방위력 강화’로 이어졌다고 공식 발표했다. 특히, 북한 군부의 반응이 강경하다는 사실에 대해 유념할 필요가 있다. 군사대결의 예각화는 또 다른 파국에 대한 전조로 읽힐 수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이나 ‘6자 회담’이 지향하는 바도 군사대결을 피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6자회담은 지속될 필요가 있으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도 남북이 함께 지속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혁명적 낭만주의에 비친 북한의 이면


북한문학은 북한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북한문학을 읽으면서, 이번 은하-2호 로켓 발사와 광명성 2호 인공위성 발사의 의미를 반추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독 1990년대 후반, 즉 ‘고난의 행군’ 이후에 북한문학에서 ‘과학(환상)소설’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사실이 눈에 띤다. 북한문학에서 ‘과학(환상)소설’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자연을 정복해나가는 인간들의 활동과 투쟁을 환상적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을 지칭한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사회의 ‘주체적 존재’임을 내세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렇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북한문학에 나타나는 ‘과학(환상)소설’의 의미를 파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앞에서 제시한 「세월의 물음 앞에」에서 핵심적 사건은 준성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ㄱ》 전염병’을 퇴치한 것이다. 이는 ‘과학(환상)소설’의 한 특징인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을 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러한 ‘과학(환상)소설’에는 혁명적 낭만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준성이 한직이나 마찬가지인 지방의 ‘토끼연구소’로 자진해 가는 것이나, 토끼와 말밖에 다루어보지 못한 그가 ‘닭 전염병’ 퇴치를 이뤄낸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과연 세상 일이 인간의 의지, 즉 혁명적 열정만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혁명적 낭만주의는 현실적 상황을 간과해 객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있는 주체의 고통을 강요하기도 한다. 주체에게 인간의 의지만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제시했을 때, 그 주체는 ‘항상 자신의 의지 결여’를 탓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 낭만주의는 밝은 미래를 예언한다기 보다는, 북한 사회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지를 증언한다. 더불어 셋째 아들에 대한 미연의 불안감, 혹은 못미더움이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북한 사회에 내재해 있는 세대 간의 차이에 대한 기성 세대의 우려를 반영한다. 대부분의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우려를 갖기 마련이다. 북한 사회도 마찬가지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북한 사회가 객관적 현실 보다는 주체적 의지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을 때, 새로운 세대에 대해 갖는 불안의식은 막연한 것이기 보다는 실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혁명 1세대와 2세대의 자발적 자기희생에 비해, 제3세대는 ‘과학적 성과’를 산출해도 ‘못 미더운 구석’을 내비치기 마련이다. 이는 북한 사회의 혁명적 기풍에 기반한 운영원리가 연속성을 갖고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고 있는가와 관련된 우려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작가는 소설의 제목처럼 ‘세월의 물음 앞에’서 어떤 답변을 내려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 고민의 해결책은 ‘과거의 혁명적 전통(준성의 모범)’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것이고, 그 전통을 현재의 삶의 지표로 삼는 것이다.


북한문학을 금지하는 사회


이렇듯 문학작품을 통해서도 북한사회에 대한 운영의 메커니즘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문학이 북한의 문화예술분야에 차지하는 우월적 지위 때문이기도 하고, 문학과 당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문학을 보다 다각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용적 맥락 뿐만 아니라, 문학형식의 변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번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북한 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 되고 있는가도, 북한 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 보다 내밀하게 읽어낼 수 있다. ‘광명성 2호’는 ‘강성대국건설’이 구체적 성과로 선포됨으로써, 북한 사회는 현재 축제분위기에 젖어있다. 

그런데, 최근 북한문학 연구나 출판에 대한 정부의 제재가 더 심해진 듯하다. 북한 문학을 통해 북한사회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봉쇄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다. 남북 문학인들이 함께 발간하는 《통일문학》은 검열로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야 남쪽으로의 반입이 허용되고 있다. 『개마고원』이 아무 제재 없이 남한에서 출간될 수 있는 것, 《통일문학》이 아무 검열 없이 남한에 반입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리 힘든 일일까.

나는 북한 체제를 찬양하기 위해 북한문학을 읽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북한문학’을 읽는다는 것만으로 남한체제에 반대하는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분단시대 남북문학을 아우르려는 한 문학평론가를 옥죄고 있다. 그래도 나는 광화문 우체국 6층의 ‘통일원 자료센터’를 들락거린다. 그리고 북한의 문예지 《조선문학》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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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선과 적전분열(이명원)

안녕하세요.
 
대안지식연구회 입니다.
 
2008년 한해 동안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저희의 부족한 정치사회비평 컬럼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사전에 알려드렸오야 하오나, 2009년 초반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들의 여러 개인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 하게 <정치사회비평> ' 컬럼이 석달간 중지되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컬럼을 중반하게 된 점, 다시금 사과의 말씀드립니다.
 
4월부터 대안지식연구회는 다시 한국 사회 정치와 사회 등 여러 분야에 대한 비평 작업을 개시합니다.
2008년에 보내주신 성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원과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좀 더 발전된 모습을 지닌 젊은 연구자들의 모임으로 거듭나도록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리며, 인사말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 금주 대안지식연구회 컬럼 제목은 <적전분열>입니다. 작금 보궐선거 국면에서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지닌 난맥상과 노동자운동의 재구성에서 닥친 딜레마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재보궐선거가 다시금 '투표소'에서 한 표찍기가 아닌 동시에, 새로운 사회운동의 재구성이 되기 위해 어떤 사유의 전환이 필요한지 성찰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 지난 호 컬럼(<유전자은행법, 디스토피아 혹은 범죄예방?>이 제대로 발송되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다시 발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컬럼은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http://jihaeng.net/blog/)에 게재됩니다.
 

                            재보선과 적전 분열



          이명원(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문학평론가)



  2009년 4.29 재보선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선거의 프레임은 MB통치 1년에 대한 심판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지난 서울교육감 선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치러진 경기교육감 선거에서의 김상곤 후보의 당선은 투표율이야 어쨌거나 반(反) MB 정서가 물밑에서 얼마만한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선거와 관련한 언론보도를 보면, 부평을 선거구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초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고, 울산북 선거구에서는 후보단일화만 된다면 진보정당 후보의 당선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전주 덕진은 탈당한 정동영 후보와 민주당의 김근식 후보가 경합하고 있지만, 누가되든 반(反)MB 세력의 당선은 당연한 결과다.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주 역시 반(反)MB 정서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른바 ‘친이’와 ‘친박’의 세력다툼은 한 지붕 두 가족인 한나라당의 향후 역학관계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선거에 임하는 모든 정치세력은 보수․개혁․진보 세력 모두가 반(反)MB 프레임 안에서 선거의 당락을 결정짓게 되는 셈이다. 현정부 들어 국회는 사실상 여야를 막론하고 행정부의 거수기 역할로 전락했고, 민의는 거듭 모욕당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반(反)MB 세력의 선전은 그래서 기대해 볼 만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른바 개혁․진보세력의 선전을 기대하면서도, 그것이 흔쾌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개혁세력의 경우, 정동영 후보의 공천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은 커다란 내분에 휩싸였다. 선거 결과에 따라 후폭풍은 당연히 뒤따를 것이다. 정동영 공천 문제는 민주당의 대안정당으로서의 경륜을 시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공천문제를 어떻게 매끄럽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민주당이 진짜 개혁세력인지 아니면 한나라당과 별다를 것 없는 지역정당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물론 결론은 명백한 지역정당으로 귀결되었다. 그 책임은 물론 당지도부와 정동영 후보 모두가 짊어져야 할 정치적 책임이다. 나는 당지도부가 전주 덕진 지역에 정동영 후보를 절대 공천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은 정치적 패착이었다고 본다. 그가 당의 대선후보였고 서울의 지역구에 출마했다 낙선한 ‘전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의 정치적 고향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개인적 권력욕’ 수준으로 폄하하는 것은 사려 깊은 태도가 아니다. 동시에 민주당이 전략공천 한 김근식 후보가 과연 이 지역구와 어떤 연계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정동영 후보 역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탈당을 불사하고 무소속연합을 구성하는 등의 정략적 발상으로 의회에 입성한 뒤, 결국 민주당으로 귀환하겠다는 정후보의 공언은, 공천에 실패한 뒤 ‘친박연대’라는 기묘한 그룹을 만들어 의회에 입성한 구(舊) 한나라당 정치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당내 계파갈등의 노골적 표출에 불과할 뿐이다. 설사 그가 당선된다고 할지라도, 정치적 경륜과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론은 그의 정치인생 후반부를 계속 따라다닐 것이고, 그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큰 꿈’의 진정성을 회의하게 만드는 부정적 ‘낙인’을 더욱 선명하게 할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만일 정후보가 낙선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의 정치인생은 여기가 ‘끝’이다. 정후보 역시 정치적 패착을 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오히려 이 시점에서 와신상담하고 있는 손학규 전 대표의 정중동의 움직임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울산 북구에서의 진보양당의 경합 역시 실망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었던 조승수 후보에 대한 현지의 지지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선거법 위반으로 그가 낙선하지 않고 울산 북구에서의 의정활동을 지속했다면, 세력이 미미한 사회당을 제외하고 유일 원내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기반은 민주당의 패착 때문에라도, 대안정당으로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더 넓게 열렸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을 분열시킨 ‘원죄’에 대한 대중적 추궁으로부터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신의 선의야 어떻든 민주노동당을 마치 ‘종북세력’의 집결지인 것처럼 비난하면서, 양당의 분열을 촉발시켰던 당사자가 재보선 국면에서 국회의원에 발 빠르게 입후보하고 또 단일화를 요구한다는 것자체가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마뜩치 않은 사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의 김창현 후보의 행보가 마냥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이고,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단일화의 조건을 제도화하려는 유혹을 갖고 있겠지만, 후보단일화의 셈법을 민주노총의 전략적 지지표와 연결하고자 끝까지 애쓰는 모습은 과연 그가 단일화에의 의지가 있는 것인지 회의케 하기에 충분하다. 동시에 진보정당이 양당으로 분열되었다면,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역시 상징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분열될 것은 분명한 일 아닌가. 동시에 울산북구 지역이 노동자의 도시라고 해서, 과연 이 지역의 민심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대표할 수 있느냐는 원리적인 의문도 당연히 제시된다. 지역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과 노동자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결국 진보양당의 후보 역시 전주 덕진에서의 정동영․김근식 후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욕망만을 내세우다가, 후보등록 전 단일화는 고사하고 선거직전까지 서로를 비난하다가 결국 단일화에 실패해 정치적 냉소를 초래하거나, 단일화를 통해 당선된다고 해도 ‘상처뿐인 영광’으로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을 거두게 만들지 않을까 진심으로 우려된다.

  물론 정치행위는 ‘최선’을 추구해야 하되, 실제로는 ‘실현가능한 최선’의 한계 안에서 결정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혁세력을 자처하건 진보세력을 대표하건 간에, 오늘의 정치지형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반(反)MB 전략 빼고는 미래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실로 우려스럽다.

  돌이켜 보면 소수야당인 민주당은 선거 패배 이후 야성(野性)을 강화시켜 확고한 개혁세력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해왔다기보다는 ‘촛불정국’에 기대어 내부개혁과 미래전망에 대한 체계적인 설계를 방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양당 역시 ‘촛불정국’에서 자못 치열한 장외투쟁을 벌인 것은 인정하겠지만, 변화된 정치적 환경 속에서 과연 정국운영의 아젠다는 고사하고, 진보정치의 미래전략을 얼마나 가다듬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 대단히 회의적이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이것은 진보․개혁 세력 전체의 위기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MB정서가 높다는 사실이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목표를 지체시킬 수 있는 원인일 수는 없다. 최근의 민주노총을 포함한 사회운동의 위기는 제대로 된 ‘진보의 재구성’이 없다면, 마치 대처시대의 영국과 같이 보수세력의 장기집권으로 한국정치가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를 현실화시킬 확률이 높다. 이른바 반(反)MB 정서의 고양이 개혁․진보 새력의 입지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키기보다는 ‘보수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오히려 촉발시켜, 한국판 대처 이미지로 무장할 것이 분명한 ‘박근혜 체제’로 귀결될 확률이 오히려 높다.

  어떤 점에서 보면, 오늘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양립은 영국의 노동당 세력이 노동당과 사민당의 양당체제로 분열된 후, 사민당은 정치적으로 사멸하고 노동당조차 신자유주의의 거센 흐름 속으로 타협해 들어간 영국 진보정당 운동의 역사를 회상하게 만드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번쯤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진보양당이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테제가 과연 오늘의 현실에서도 유효한 진단인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오늘의 민주노총의 위기를 포함하여,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는 개혁․진보세력에 동의하는 유권자들이 선거 국면에서 보수정당에 지지표를 던지는 아이러니는 이면의 더 강력한 현실적 계급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1990년대 이후 일반화된 ‘투자자’라는 정체성이 그것인데, 1960년대 영국 노동당의 선거에서의 패배를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이 ‘투자자’ 정체성에서 찾았고, 1980년대 대처리즘의 확산의 원인을 검토했던 스튜어트 홀이 지적했던 것 역시 노동자들의 ‘투자자’ 정체성으로의 ‘변형’이었다.

  2009년 현재 한국의 노동자 전체가 이 ‘투자자’ 정체성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극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고 정치적으로는 진보․개혁 세력임을 스스로 공언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나날이 변화하는 증권시황판에 눈길을 던지면서, 자신이 투자한 펀드와 부동산의 등락에 예민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우리는 의지적으로 부정하지 말고 비관적으로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진보적 노동자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른바 ‘강부자’에 속한 계층이 열렬한 ‘강남좌파’로 변신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자신이 처해 있는 변화하고 있는 물적 토대의 변화는 동시에 그의 정치적 의식 역시 유동적으로 만들며, 정체성이란 그렇게 역사적 환경변화 속에서 수시로 출렁거리는 액체성에 가까운 것이다.

  때문에 오늘의 진보․개혁세력들이 고민해야 될 문제는 이것이다. 평소에는 정치적으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있던 사람들이 왜 지난 대선국면에서 MB를 지지했는가. 금융자본주의의 세계화에 따라, 그것에 연결된 노동자 정체성과 이데올로기 역시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이 이러한 계급 정체성의 문제나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한 고민을 성숙하게 전개시키면서, 새로운 리더십의 모델 및 정치적 아젠다를 창출하는 노력을 치밀하게 진행시키지 않는다면, 임박한 재보선의 결과와 무관하게 진보개혁 세력의 정치적 전망은 장기적으로 보자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진보의 재구성’이 말이 아닌 실천으로 나타나야 할 때가 지금이다. 그러니 재보선 정국에서의 적전분열 양상이 내게는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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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지식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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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은행법, 디스토피아 혹은 범죄 예방?



김 원(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블레이러너"와 공포의 역사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란 영화에서, 서기 3000년경 소수 엘리뜨 집단이 첨단과학기술을 독점 하며 다수를 통제하는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그렸다. 지난 세기말부터 과연 인류의 미래는 어떤 색조를 띌 것인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았다. 특히 과학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인간의 삶에 장밋빛 미래로 다가올 것인가 등을 둘러싼 회의적인 이야기들도 적지 않았다.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는 ‘공포'를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공포는 늘 역사적으로 만들어지고 유통되어 왔다. 20세기 초반, 상당수 지식인들은 ‘서구의 몰락’이란 화두를 통해 잠재적인 공포를 공유하기도 했다. 오르케다 이 가제트의 <대중의 반역>이나 1920년대 군중심리론 등의 바탕에 깔렸던 것은 ‘통제하지 못하는 대중’에 대한 잠재적 공포였다. 산업사회 이후 등장한 새로운 익명의 집단인 대중에 대해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공포는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의 눈앞에 등장했다. 그 이름은 나치즘이나 파시즘 등으로 불렸던 집단동원 체제였다. 노골적인 인종주의와 집단살인, 상대편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 여러 가지 이념들이 착종되어 나타난 이 체제는 서구 사회가 그 동안 쌓아온 민주주의를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또 다른 공포였다. 서구 사회는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공동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의 전선 혹은 동맹을 만들어 싸웠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다른 공포가 찾아왔다. 그 공포는 '냉전'이 만들어 낸 '공산주의'라는 적 이었다. 이처럼 인류는 끊임없이 '적을 생산하며 생존'해온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이 점은 한국도 유사했다. 냉전 하에서 국민의 적은 '빨갱이'라고 불리는 비국민인 '적'이었으며, 적의 재생산은 한 사회의 통합을 유지하는 중추였다. 사회적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의 존재 자체가 역설적으로 사회 통합을 가져오는 촉진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유전자은행법은 주목할 만한 흐름이다. 



유전자은행법, 그 쟁점들



최근 경찰청은 법무부와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유전자은행법" 을 다음 달 공식적으로 입법 예고할 계획임을 밝혔다. 유전자은행법 설치 추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7대 국회에서도 "유전자 감식정보수집법안"이 상정되었지만, 인권 단체들의 강한 반발로 법안은 자동 폐기된 바 있다. 이 법안은 2008년 '안양 초등생 살인 사건' 당시 다시 등장하여 새로이 정비되었으나, 국회에 법안이 제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으로 법제화에 급물살을 탔다. 사건 당시 DNA 물증을 통해 강호순의 범죄 사실을 입증했으나, 이에 대한 체계적 관리 시스템은 미비했으며, 이후 검찰과 경찰은 흉악 범죄를 예방하고 범인 조기 검거를 위해 "유전자 감식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유전자 감식법안"은 살인, 강도, 강간, 추행, 절도 등 이른바 11대 강력 범죄를 저질러 구속된 피의자와 형이 확정된 수형인을 대상으로 DNA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또한 피의자나 수형자가 유전자 채취를 거부할 경우,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강제적으로 채취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지난 시기와 유사하게, 유전자은행법은 강제적인 DNA수집 등을 통한 인권침해 논란, 점차 DNA 채취 대상이 확대될 경우의 위험성 그리고 수형자가 불기소될 경우 이를 삭제한다고 하나, 과연 이러한 조치가 실제로 이루어질 것인지 여부 등을 놓고 논란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판옵티콘의 변형된 재림인가



몇 해 전 인권영화제에서 "6개의 시선"이란 옵니버스 영화 가운데 <그 남자의 정사>라는 소품을 본 일이 있다. 짧은 영화의 줄거리는 한 성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로 인해 주거 공간에서 집 앞에 지문표시가 새겨져 있고, 같이 주거하는 공간에서 철저히 격리되고 배척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영화는 사회적으로 무시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개인의 인권조차 보호될 때야만 해야 진정한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임을 역설했다. 한 인간이 죄를 짓는다고 하여 평생의 낙인을 찍는 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 사회는 주민등록과 지문을 통해 기본적인 개인 정보에 대한 관리를 오랫동안 시행해왔다. 더군다나 DNA 자료 수집이란 생체 자료 수집은 지문과 주민등록과는 질적으로 다른 성격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럼 범죄 예방이나 사회 불안을 이유로 하나씩 늘어가는 국가에 의한 개인 정보 수집은 자칫하면 사회안정이란 명목 하에 개인의 사생활과 개인 정보에 대한 무분별한 관리 및 통제로 이어질 가능성 자체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제레미 벤담은 학교·공장·병원·감옥 등에서 한 사람에 의한 감시체계를 판옵티콘이라 명명했다. 푸코 역시 개인의 모든 행동거지에 관련된 자료가 축적된 데이터베이스가 마치 판옵티콘이 죄수들을 감시하듯이 한 개인의 출산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대중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전체주의적 권력의 도구로 오용될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우리는 범죄 예방을 이유로 판옵티콘의 현대적 재림을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죄를 지은 개인의 인권조차 존중하는 사회를 꿈꾸어야 할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우리가 갈 길은 후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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