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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거부학, 욕망의 촉진학'...인문정치에 주목하라



이명원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문학박사)




내일이 4.9 총선이다.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겠지만(?), 진보정치의 끈질긴 희망이었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4년 전 총선에 비하자면, 자못 실망스러운 지지율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


4.9총선, 민주주의 왜곡 프레임의 재확인


사실 이번 총선의 희비를 가르게 된 프레임은 ‘안정론’과 ‘견제론’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적 의제가 오직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그것도 중도나 보수라는 프레임 안에서만 뱅뱅 돌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런 반면,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권(民權)’에 대한 사유는 더욱 후퇴하는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다. 사실 민주주의는 그 어원 자체가 ‘민(民)’이 ‘주(主)’가 되는  정치-사회모델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정치적 상상력의 지평은 ‘국(國)’이 ‘주(主)’가 되거나, 성장주의의 프레임에 갇혀 ‘자(資)’가 ‘본(本)’이 되는 사회로의 이행이 당연시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기초와는 상관없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상상’이 얼마나 왜곡된 프레임을 형성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성찰하게 만든다.


권력독점의 욕망의 도구가 된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상상’에 있어 또 하나 왜곡된 프레임을 제공하는 것은 ‘대의제’라는 선거 메커니즘의 불가피성에 대한 온순한 인정경향이다. 그러나 대의제로 표상되는 민주주의의 현행 형태는 만고불변의 진리이기보다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려운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대의제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야 실현될 수 있는 기왕의 지배엘리트들의 권력독점에 대한 권력의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고안된 ‘근대적 장치’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희미하게나마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두레’나 ‘민회(民會)’, 그리고 비서구지역에서 여전히 끈질기게 유지되고 있는 ‘마을공화국’ 모델들이 보여주고 있는 긍정적인 민주적 내용물들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의 모델 속에는, 오직 ‘대의’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확인받는 ‘유권자로의 타자화’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의 경제적 격차와 교육정도, 그 밖의 다채로운 신분적 표지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마을공동체 공동의 의제와 현안에 대한 책임 있는 정치적 주체로서의 태도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 작은 공동체의 민주주의는 ‘대변자’를 요구하지 않으며, 명목상의 ‘대표’는 존재하지만 이조차도 자연스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환하는 것이니, 권력독점에 대한 욕망이 번성하기는 어렵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굳이 ‘공동상상’을 필요로 할 것도 없이, 논의되는 정치적 의제들이라는 것이 구성원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맞닿아 있으며, 의사소통의 범위라고 하는 것이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 가능한 작은 범주로 제한되어 있고, 정치적 실천과 봉사의 의무가 구성원 모두에게 잠재적으로 부과되어 있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정치참여에 대한 준비와 각오를 일상적으로 벼려나가는 주체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고전적 모델로 흔히 언급되는 그리스 민주주의 역시 폴리스의 시민 각자는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정치적 참여와 봉사의 순간이 돌아오면 기꺼이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적 의무를 다했다는 점도 이 부분에서 상기될 필요가 있다.


무관심 양산하는 대의제 넘어 ‘시민직접정치’ 모색 필요


요컨대 중요한 것은 ‘대의제’로 상징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이,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공동체 구성원 그 자신의 정치적 참여의무와 책임, 그리고 이에 따르는 번거로운 일상적 관심 모두를 회피하게 만드는 기묘한 ‘무관심 구조’를 영속적으로 구조화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선 투표율이 60% 내외에서 간신히 결정되고, 총선의 경우 이보다 낮은 50% 내외의 투표율을 보여주는 현상은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대의제’ 정치의 무관심 구조가 초래한 결과이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은 다른 사실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오늘의 평범한 유권자들에게 대선을 통해서 관철되는 ‘국권’이건, 총선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주장되는 ‘민의’이건 간에, 도대체가 그러한 정치적 행위 모두가,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로 상징되는 일상과는 무관하다는 ‘무의식’이 팽배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오늘의 시민들이 국가권력은 물론 의회권력 모두에 대한 불신을 노골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른바 진보정치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태도는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오늘의 심화된 ‘경제적 양극화’ 구조를 단순하게 이해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진보정치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고 심화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정은 차라리 정반대여서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오히려 심화되어 가는 것은 보수화이다. 동시에 오늘날 진보정치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세력들은 노동자를 포함한 대다수 민중세력이기보다는, 정치적 계몽의 수준이 높고, 이데올로기 지향성이 강하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하는 진보성향의 지식인들이라는 점은 차라리 아이러니다. 반면 보수정당에 대한 유력한 지지계층은 진보정당의 지지층이 되어야 할 대다수 민중들이라는 아이러니도 부정하기 힘들다.


홍세화류의 계몽주의로는 안된다


이런 현실에 대해 가령 홍세화 선생 같은 경우는 민중들의 ‘정치적 각성’이 필요하다는 식의 계몽주의적 태도를 자주 드러낸다. 자신이 처해 있는 계층․계급적 상황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기반한 계층․계급의식이 형성된다면, 또 진보적 의식을 지속적인 계몽과 각성을 통해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오늘과 같은 진보정치 지형에서의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홍세화 선생과 생각을 달리 한다. 대다수 민중들이 그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계급적 한계상황에도 불구하고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계급에 대한 명료한 자기의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오늘의 민중들은 명료한 계급의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끈질긴 욕망의 상승구조, 즉 ‘계급무의식’에 충실하기 때문에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대선정국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던 많은 수의 민중들은 ‘7․4․7 공약’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그것을 강렬하게 ‘욕망’했기 때문에, 이명박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진보정치를 지지해야 마땅할 민중들이 오히려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현상은, 오늘날 대다수의 민중들이 진보정치에 대한 인식의 미숙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계급무의식으로 상징되는 계층․계급적 '상승욕망'이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정치적 무의식의 욕망구조 변화가 핵심


그러니 진보정치 세력이 한국의 정치지형 안에서 폭넓은 세력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힘써야 되는 것은 ‘정치적 의식화’에 기반한 추상적 정치담론이기보다는, 이러한 대중들의 ‘정치적 무의식’과 욕망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예리한 문제의식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거론하고 있는 ‘욕망’이나 ‘계급무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치적 각성보다 더 어렵고 힘겨운 과제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가능할까. 나는 진보정치세력들이 정치공학에 속하는 다채로운 대중사업을 수행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과 함께 일종의 ‘인문정치’에 대한 인식을 높여나가는‘ 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 대다수 민중들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무의식’에 해당하는 ‘성공 이데올로기’나 ‘물질주의적 행복’, 또는 ‘경제성장주의’와 ‘국익이데올로기’와 같은 ‘공동상상’의 의제들을 대체할 수 있을, 인문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의제화 하고, 이를 일상적인 교육서비스의 형태로 민중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인문정치’의 실험은 즉각적이면서도 가시적인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자나라’와 ‘부자국민’으로 상징되는 욕망 충족의 캐치프레이즈에 대한 쏠림도 크지만, 최근에는 ‘욕망의 거절’로 보이는 ‘보살핌의 철학’과 생태적 전망에 입각한 ‘풀뿌리 자치운동’, 그리고 ‘인문적 대중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질적 욕망을 거절하고 다른 욕망을 촉진하는 ‘인문정치’에 주목하자


이는 오늘의 민중들이 한편에서는 ‘물질주의의 복음’이 뿜어내는 유혹에 거세게 휘말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의혹과 불신 역시 다른 한편에서는 자못 끈질기게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의 진보정치가 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계급무의식의 밤바다’ 저 건너편에 반짝이는 ‘등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없는가. 보수정치세력들의 천박한 물질주의의 ‘공동상상’을 대체할 행복한 인문정치의 다채로운 실험과 모색은 그래서 필요하다. 이 인문정치 실험은 물질주의에 고착된 민중들의 ‘공동상상’과 ‘계급무의식’의 거처를 뛰어넘어, 보다 인간적인 삶의 전망이 가까운 데 있다는 행복한 상상력과 ‘다른 욕망’을 촉진하는 즐거운 정치실험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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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펌] '욕망의 거부학, 욕망의 촉진학'...인문정치에 주목하라

    Tracked from 물이 되는 꿈 2008/04/12 00:43 Delete

    '욕망의 거부학, 욕망의 촉진학'...인문정치에 주목하라 / 이명원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문학박사) 내일이 4.9 총선이다.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겠지만(?), 진보정치의 끈질긴 희망이었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4년 전 총선에 비하자면, 자못 실망스러운 지지율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 4.9총선, 민주주의 왜곡 프레임의 재확인사실 이번 총선의 희비를 가르게 된 프레임은 ‘안정론’과 ‘견제론’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적 의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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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상아 임마 2008/04/09 00:47 # M/D Reply Permalink

    정돈된 논리라도 펼쳐가며 반박을 해봐라. 하상아.. 아님 매너라도 있던가. 남은 공들여 쓴 글인데 넌 거기에 제대로 읽지도 않고 욕질이냐. 댓글 달 시간에 책 좀 봐라.
    너야말로 무슨 난독증+ 피해의식 있는 것 같다.

  2. 둥글게 2008/04/10 00:53 # M/D Reply Permalink

    선생님, 담아가요 :)

  3. 사막에 사는 사람 2008/04/12 03:01 # M/D Reply Permalink

    선생님 저도 퍼가요...^^
    아..근데...오마이뉴스에 나오는 '투표 안하는 20대 한심하다?'는 기사를 보고 있으니 잠이 안오네요...
    아니예요 사실은 지하철에서 너무 많이 졸아서 그런 것 같아요...^^;;

    문득 생각난 것은 87년으로 대표되는 소위 '386세대'가 90년대로 넘어가면서 이어졌던 일련의 움직임들을 외면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20대를 '한심하다'고 비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예요.

    사실 저로서는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비판적인 편이지만, '386세대'가 '한심하다'는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87년 이후에도 '3당 합당'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 이어졌던 학생 운동을 '선배 흉내만 낸다'고 외면했던 것에 대해서 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는 것일까요(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만요)?

    91년의 죽음들에 대해 대한 87년 세대의 외면, 전대협 세대는 국회의원이 되고 한총련 출신은 수배중인 상황이 된 것이(솔직히 아직도 수배중인지는 잘 모르겠네요...ㅠ) 오늘날에 이르게 된 출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대로 넘겨짚어보자면, 386세대 역시 '경제동물화'되는 사회에 대해 근본적인 인식이나 비판을 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은데 말예요.

    68혁명을 이끌었던 콩방뒤(혹은 콘 밴디트)는 '최초고용계약' 법안에 대해 시위하는 프랑스의 젊은이들에 대해 한국의 386세대가 87년이후의 세대에 대해 보였던 것과 유사한 반응을 보였다고 들었어요.'투표 안 하는 20대가 한심하다'고 하는 386세대들의 모습과 콩방뒤의 모습이 다시 한 번 겹쳐지는 건 왜일까요?

    아 민망해라, 더 민망해지기 전에 자야겠어요
    내일은 신문좀 읽어야겠고요
    그래야 '~인 것 같다'는 표현 좀 줄일 수 있겠지요
    (한숨ㅠ).

  4. 둥글게 2008/04/13 14:33 # M/D Reply Permalink

    나, 사막에님 말에 격한 동감.
    3,40대도 단순수치만 보면 한나라당이 훨씬 높음.
    부끄러운 줄 모르고 20대 뭐라 한다니까 -_-
    그리고 대체 20대는 다 '진보적'이라는 믿음은 어디서 오는거야?

  5. 김지은 2008/05/08 11:43 # M/D Reply Permalink

    '계층, 계급적 상승 욕망'이 문제라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물질적' 존재가 얼마만큼 '물질주의의 복음'에 저항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진보적인 운동을 주도하는 것은 당장 밥먹을 일을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이나 저소득층보다는 중산층에 가까운 지식인들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진보적인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노동자들의 입장을 100% 대변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요. 자신의 밥그릇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 본인들이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을 문제들 (쇠고기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죠.. 결국 비싼 한우를 사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밥상을 가지고 대통령이 대표로 협상한 격)을 가지고 협상을 하게 되기 쉽상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직접 참여의 필요성이 더없이 중요할 수 밖에 없겠죠.

    전 '욕망 구조의 변화'의 시작은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삶의 기반을 잠식해 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똑바로 바라보고 그에 저항할 수 있겠지요. '환상'을 깰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환상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 인식'에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진정한 희망을 꿈꾸게 하는 '집단적 상상'이 생겨나고 또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지행이 그런 역할을 하는 하나의 숙주가 되리라는 예감과 기대를 동시에 가져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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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총선을 넘어(김원)

 

4.9총선을 넘어

- 진보적 저항 벨트의 형성을 제안한다 -


김 원

(<대안지식연구회> 대표, 정치학 박사)


‘적의 패착에 의존하는 정치’의 재연


한동안 이번 총선은 한나라당이 ‘독식’할 것이라고 대다수가 예측했다. 하지만 최근 흐름은 이른바 밑바닥 민심인 민도(民度)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는 한 달 전에 비해 25%가 하락한 51.8%,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여당 견제론에 의해 추월당한 상황이다.


물론 이러한 지지율 하락은 반대당의 적극적인 대안의 조직화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의 잇따른 패착(敗着)에 기인한 것이다. 이른바 적극적인 지지자의 동원이 아닌, ‘부정적인 반사 이익’에 기초한 지지율의 확대인 것이다.


보수 정치세력, 우리와 ‘다른 세계의 사람들’


‘고·소·영’이란 유행어를 만들 정도로 이명박 정권의 초기 행보는 일반 대중들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청와대와 내각 인선 과정에서 불거진 관련자의 부동산 투기 의혹, 재산 형성 과정의 문제점, 표절 논란, 병역 기피 문제 그리고 탈세 등은 이명박의 ‘성공 신화’에 대한 잠재적인 기대를 지니던 이들에게는 충격이었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정치세력에 대해 어렴풋한 인식을 갖던 대중들은 이 과정을 통해 ‘상위 5%에 해당하는 이자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구나’라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기 시작했다. 바로 대선 시기와 다른 보수 정치세력에 대한 ‘체감도’가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상들은 이미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시기 한나라당에 의해 비판되고 제기되어온 사안들이다. 한나라당은 과거 자신이 던진 돌이 ‘부메랑’이 되어 뒤통수를 맞고 있는 셈이다.


보수양당의 공천혁명? ‘좋은 정당’의 길과 거리 멀다


한편 이제 열흘도 안남은 총선은 ‘의회’의 정치적 대표자를 뽑는 선거라기보다, ‘후보 검증’으로 대표되는 ‘공천 선거’로 비추어지고 있다.


초기 민주당 박재승에 의해 주도되던 ‘공천 쿠데타’는 비례대표 선정 과정에서 계파 간 지분 분할이라는 용두사미로 전락했다. 한나라당도 높은 현역의원 탈락율을 내세웠지만 친박 연대 및 공천 비리 및 부적격자 문제로 ‘총선후 후폭풍’이 가시화된 상태이다.


보수양당이 추진한 ‘공천 개혁’은 개별 인물의 도덕성에 기초한 ‘인물 교체’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우는 현역 의원의 ‘교체율’ 자체가 개혁 공천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이처럼 양당의 상황은 시민사회의 불만과 이해를 매개하는 ‘좋은 정당’의 가능성과 현실 정당간의 ‘거리’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권력의 亂’으로 비화되고 있는 보수 정치세력의 분화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명박 정권을 필두로 한 지배 블럭의 균열이 초기부터 눈에 띤다는 점이다. 이미 2007년 대선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한국 사회 보수정치세력의 ‘분화’는 이미 예견된 현상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계보의 숙청’과 이재오 등 소장파의 난(亂)에 대해 형님의 손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불거진 지배블럭의 갈등은 향후 보수 정치세력의 분화를 가속화시킬 징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분화가 정책이나 이념에 기초한 것이 아닌 ‘국가권력과 당내 권력’을 둘러싼 성격을 띄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서민 배제 정치’의 향연이 될 4.9총선


이런 일련의 과정은 4.9 총선이 여전히 시민사회의 균열은 선거과정에서 의제-정책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특정한 의제에 대한 배제가 의식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법무부가 발표한 '체포전담반(일명 백골단)' 부활, 전기 충격총(테이저건) 사용, 시위예상자 사전검거, 참가자 즉결심판 강화, 경찰의 면책권 보장 등 반인권적 법안, 이랜드와 코스콤 등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대선 시기 적극적인 지지 동원을 위해 내세웠던 한반도 대운하, 매년 7% 경제성장을 통한 60만개 일자리 창출과 신혼 부부 주택 12만호 공급 등은 ‘공약’에서 사라졌다.


이는 특정 의제에 대한 배제와 집권당에 불리한 의제의 배제가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진보 정치세력마저 ‘%의 정치, 지구상 선거정치’에 함몰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사회운동 진영의 수동적인 대응이다. 총선 구도가 ‘공천 선거’로 진행되는 와중에도 사회운동 진영은 적극적인 의제 설정을 통한 대립선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교수와 일부 야당 진영에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반대 여론을 공론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2002년 대선의 경우 상징적이지만 ‘부유세’ 등을 통해 대립 지점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재 모습은 사회운동을 포함해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공히 지역구를 통한 선거운동에 몰입된 상태이다. 이는 여론조사라는 ‘%의 정치’ 혹은 ‘지구당 선거 정치’로 사회운동이 함몰되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대중 스스로 조직가가 되는 ‘탈상층-탈중앙의 진보적 저항 벨트’가 희망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 대한 사회운동의 대안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비록 지지율은 감소 추세이지만 대중은 세계화와 1류 국가, 고용이 동반되는 성장, 저비용-슬림화된 정부에 대한 막연한 기대 심리를 여전히 갖고 있다. 이것이 현재 대중 이데올로기이다.


이러한 시장주의와 성장론 등의 가치가 함축된 것이 한반도대운하 사업이다. 사회운동 진영은 대운하의 비현실성에 대한 지적에 그쳐서는 안 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지역-환경-문화-고용을 잇는 진보적 저항 벨트를 통해 대운하의 가치에 대항해서 형성해야 한다.


바로 대운하 건설 예정 라인과 지역을 따라 지역 사회운동과 시민단체, 노조, 지식인과 대학이 지역적 연대의 망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대중이데올로기에 대한 ‘역전’을 시도해야 한다.


성장과 시장주의 가치에 대항하는 진보적 저항 벨트는 2002년 총선 시민연대와 같은 상층 조직, 엘리트 그룹이나 여론을 이용한 이슈 파이팅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서울 중심의 중앙 조직의 지침에 의해 움직이는 형태여서도 곤란하다.


진보적 저항벨트는 반성장, 반세계화, 반시장 등의 가치를 ‘지역 차원’의 연합적 운동을 통해 구현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위에서 아래로의 동원이 아닌, 지역 사회운동의 이슈를 사회운동과 각급 운동 조직의 연결해서 대중의 힘에 기초한 기획이어야 할 것이다. 아직 그들만의 선거가 아닌, 대중이 스스로 조직가가 되는 대중정치의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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