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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세력은 어디에 있는가?

 
이영제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촛불시위라는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독주는 계속되고 있다. 강부자·고소영 내각 임명과 쇠고기 수입개방, 기업 편들기와 공기업 임원에 대한 낙하산 인사, 언론 장악과 사정기관의 종복화, ‘건국절’이라는 이종적 국경일의 도입 시도 등은 여론의 반발을 고려할 때 어느 것 하나 결코 추진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상실한 헤게모니를 상쇄하기 위해 물리력을 노골적으로 동원하는 강수를 두면서 까지도 드라이브를 멈추지 않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뒷받침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추진력의 세 가지 배경
 
첫째, 언론·사정기관의 사유화이다. 언론 및 사정기관의 사유화는 일방향적 소통을 강제하기 이전에 양방향적 소통을 차단하고 대항담론 형성 및 담론 형성 네트워크를 통제함으로써 대항 헤게모니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제16대 대선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대거 양성된 보수 네티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대안 정치세력의 부재이다. 제도정치 영역에서 비보수정치세력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더 나아가 예상가능 기간 동안 중앙정치 영역에서 제도적 대안세력의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촛불시위 발생 배경의 하나가 되기도 한 대안 정치세력의 부재는 사사건건 대통령과 국민이 직접 맞닥뜨리는 서로에게 ‘피곤한’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무기력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이명박 대통령이 과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셋째, 가장 주요하게 다수의 비동원상태의 유지이다. 참여정부 이후 지속된 각종 선거와 대선과 총선, 교육감 선거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보수적 동원이 진보적 동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중간층 또는 무당파층의 최소동원 상태만 유지된다면 정권 유지 및 재창출에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즉 저항의 가능성이 높더라도 그것을 여론조사에서만 분석 가능한 잠재화된 상태로 관리하는 것으로 비가시적인 여론의 무시와 가시적 저항에 대한 억압 또는 분리로 나타나고 있다.
 
비보수세력의 집권은 여전히 ‘예외상태’
 
우측깜박이를 킨 이명박 대통령의 후진은 좌측깜박이를 키고 우회전한 노무현 정권의 실패한 개혁의 연장선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해 입문했다는 점 이외에도 절차적 정당성을 절대화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집시법은 노무현 정권 하에서 조금 더 개악되었고,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불허와 폭력적 진압은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현재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임채진 검찰총장과 어청수 경찰청장, 김종훈 통산교섭본부장 등은 ‘간지나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은 이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단순히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에 그치지 않고 개혁적 세력의 집권이 예외상태라는 인식을 확고히 했다는 점이다. 보수세력의 집권이 정상적인 상태이고 개혁적 세력의 집권은 보수세력의 실패와 포풀리즘과 같은 술수에 기인한 예외적 상태라는 것이다. 결국, 노무현 정권의 실패와 언론․사정기관의 도구화 등은 보수집권이라는 정상상태에 대한 확신이 개혁적 세력 집권이라는 예외상태에 대한 두려움에 비해 월등했다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저항의 조직화와 대안의 부재
 
이명박 대통령의 독주와 지난 10년간 진행된 개혁의 급속한 후퇴, 그리고 제도정치 영역에서의 개혁-진보라 일컬어지는 세력들의 침체는 다양한 이슈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직접행동’과 ‘반 이명박 연대’과 같은 바리케이트 전술, 풀뿌리 민주주의와 같은 진지전 등 다양한 형태의 대안의 조직화로 이어지고 있다. 다양하게 조직되는 저항들은 진보세력을 동원하는 데에는 성공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어느 것도 비동원상태의 시민들을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보인다.
 
시민운동, 대안세력이 아닌 기성정치세력
 
새로운 대안으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가 거론되고 있다. 그동안 주저했던 시민운동 진영이 지방선거를 계기로 전면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하는 것이 비동원 또는 반동원 상태의 무당파 층에게 어떠한 감동과 동기를 부여할 지는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시민운동은 이미 대안세력이기보다는 기성정치세력으로 상상의 영역이 아닌 현실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정치세력의 분화와 진보-개혁적 재구성은 어떨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새로운 대안세력의 성장은 너무나 먼 이야기이다. 물론 이것이 가치 없다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세력과 다를 바 없는 구 민주당 세력과 사이비 개혁의 전도사인 열린우리당세력이 합친 민주당은 어떠한 덧칠을 한다고 해도 대안세력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특히 이들의 지리멸렬함은 될 것도 안 되게 만드는 ‘마이너스의 손’에 다름 아니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역시도 현실적인 대안세력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비판적 지지’가 보여주듯이 이들의 독자적 성장을 하염없이 기다릴 만큼 국민들은 여유롭지 못하다. 새로운 대안세력의 성장보다는 오히려 보수세력의 자멸과정에서 구래의 ‘대항세력’이 권력을 획득하는 예외상태가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시민운동 세력을 포함한 기존 정치세력을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재구성 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다. 기존의 ‘반00’와 같이 타자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양적인 연합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능동적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질적인 연합의 형성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는 중도-개혁세력의 분화, 진보정당의 스펙트럼 확장, 시민운동 세력의 가치-정책지향적 참여가 병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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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진실의 순간, '기륭'의 투쟁"
 
이 승 원
(대안지식연구회)
 

진실의 순간
 
"The moment of Truth", 말 그대로 "진실의 순간"이다. 스페인어로 "Moment De La Verdad". 성난 황소와 유희를 즐기던 투우사가 긴 칼을 들어 황소의 정수리를 찌르는 마지막의 순간에 외치는 소리이다. 이를 어떤 스페인 학자는 특정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황소가 쓰러지든 투우사가 짓밟히든 이 진실의 순간을 양자는 피해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2008년 대한민국의 여름. 우리가 탈출할 수 없는 '진실의 순간'은 무엇일까?
 
며칠 전 경찰 특수기동대의 소름끼치는 시위진압 훈련과 국군의 가공할만한 독도방어훈련이 언론을 통해 보여졌다. 국가의 억압적 기재들의 때 아닌 언론전시는 우리에게 탱크와 장갑차의 굉음이 만들어낸 1961년 5월과 1979년 12월의 전율과 공포를 떠오르게 했다. 이를 시작으로 계엄 이상의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는 2008년 이명박 정부는 투우사가 달려드는 황소를 향해 칼을 휘두르듯, 여기저기서 난도질을 하고 있다.   
 
체포수당으로 혈안이 된 경찰 특수기동대들이 촛불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고, 최근 국무총리는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출석요구를 관례를 이유로 무시해버렸다. YTN 사장 선임이 깡패를 동원하여 진행되는 동안 감사원은 KBS 특별감사 결과보고에서 KBS이사장에게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을 요구했고, 이사회는 재청해버렸다. 이명박-부시 간의 한미정상회담은 한편으로는 미국산 스테이크를 한우갈비와 동격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우익세력들에게 서울시청광장을 내어주는 소기의 성과를 내며 짧게 끝났다. 그러는 동안 정부는 해방보다 분단을 더 강조하는 '건국절' 제정을 추진하면서 과거사 청산의 기회를 '청산'하려 하고 있으며,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0.25%p 인상하여 서민들의 대출이자에 대한 부담을 더욱 크게 하였다. 찌는 무더위만큼 일사불란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명박 정부의 사회장악 프로그램은 우리의 호흡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촛불의 거리에도, 국회 국정조사장에도, KBS와 청와대에도 진실의 순간은 없었다.거리의 촛불이 꺼진다해서 민주주의가 말살되는 것도 아니고, 총리의 국회폄하가 야당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 것 같지도 않다. YTN과 KBS 사장이 누가 된다하더라도 기자들이 자신의 양심을 배반하지 않는 한 새로운 출발이 가능하다.
 

"기륭"의 호흡
 
대한민국 진실의 순간은 기륭전자 해고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장에서 소리없이, 그러나 아주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왜 1000일 넘는 농성투쟁을 이어가고 있고, 촛불의 그림자 속에서 결국 30kg의 몸무게로 폭염 속에서 관까지 짜가며 두 달 가까이 단식투쟁을 해야하는지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들은 싸워왔고, 그 때부터 '우리'는 그들의 투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짧아져가는 그들의 호흡이 우리의 동맥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지난 3개월 간 '우리'는 촛불의 거리에서 '민주공화국'을 외쳤고, 그 속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급기야 미국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독도 사태를 진정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위생과 검역주권, 국민주권, 영토주권을 위해 거리로 나가 폭염과 폭정에 맞서 싸운 '우리'는 '비정규직'문제를 '운동권' 중심의 의제이고 따라서 촛불집회에서 크게 다뤄지면 집회가 변질되고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출처없는 우려 때문에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기륭전자와 함께 KTX, 뉴코아-이랜드, 코스콤, 재능교육 등 800만 비정규직들은 관중없는 경기장에서 국가의 칼을 피해가며 지쳐가고 있었다. 
 
이들의 정수리에 언제 국가의 칼이 꽂혀 쓰러질지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그 쓰러짐이 그저 신문의 한 단면을 장식하는 일상의 일로 여기는 우리의 "익숙함"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러다 소리없이 우리의 숨도 끊기고 그래서 그저 순응하는 비정규직 주체로 하루하루를 사측과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부끄러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패한 파시스트의 소망
 
통치자가 가장 바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국가폭력의 미학이다. 법질서의 원활한 유지를 위해서는 처벌의 엄격함이 필요하고, 그 처벌의 엄격함은 경찰, 감옥과 같은 폭력적 기재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육해공군의 위용이 그 배후를 장식한다. 통치자는 그 국가폭력이 사회적 거부감을 만드는 것을 원치않는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어야하고, 특수기동대의 로보캅복장과 공군 F-15K의 세련미는 정의를 지키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상징이어야 한다. 법질서가 폭력적 기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철학과 국민들의 순종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통치자의 또 하나의 소망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이 '민족주의'이고, '통일'이고, '잘살아보세'이다. 대한민국의 좌우가 독도문제처럼 하나가 된 적이 드물고, '반통일' 세력만큼 배신자가 없고, 잘 살자는데 재뿌리는 듯하면 그 결과는 뻔하다. 과거 유신과 5공의 독재자들은 그래서 교복을 입혔고, 반공글짓기와 포스터 그리기를 번갈아 시켰고,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했고, 농촌에 시멘트 푸대를 배급하였고, 식모와 버스안내양을 도시의 '공순이'로 불러들였다. 질서유지에서 벗어나는 자들을 처벌하기 쉬웠던 만큼 질서유지가 쉽고 편했다.
 
현직 대통령은 폭력과 전체주의를 아름답게 조화시킨 과거의 파시스트 통치자들을 부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폭력적 기재들을 재정비하면서 그 위용으로 슬그머니 대중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렇게 촛불을 끄려하고 있고, 그렇게 제도정치를 변질시키고 있고, 그러면서 우익보수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국민통합을 꿈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 대통령은 가난과 실업을 외부의 적에게 돌려버린 영악한 파시스트가 절대로 될 수 없다. 그저 반민주적 독재자라는 삼류 정치인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권력재창출에 끊임없이 불안해 해야만 한다(파시스트가 차라리 낫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비정규직 문제에서 비롯된다.
 
20-30여년 전 노동현장에서의 차별과 폭력의 수준이야 야만에 가까웠지만, 높은 경제성장률은 높은 고용률과 함께 했고,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의 유지는 적어도 국민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면 '나도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일할 수 있었고, 그래서 싸울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국가는 이를 미끼로 국가폭력을 사회적으로 미화시킬 수 있었고, 국민들은 어찌되었든 '조국근대화'와 '선진조국창조'에 하나되어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비정규직 문제는 현직 대통령이 폭력을 미화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어 강력한 파시스트 국가로 나아갈 수 없도록 하는 최대 장애물이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 정책이 유지되는 한 비정규직 문제는 악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로 인한 고용불안과 사회양극화의 심화는 과거와 같은 양적지표에 따른 경제발전 환상을 유지시킬 수 없도록 한다. 이들의 존재가 드러날수록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리고, 따라서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한 국가의 폭력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현직 대통령과 조중동이 방치와 침묵으로 기륭을, 이랜드를, KTX를 고사시키려하는 이유가 바로 파시스트가 되지 못하는 자신들의 3류정치 한계에 있는 것이다.
 

"기륭"의 방치와 사회적 죽음
 
현직 대통령과 조중동이 방치와 침묵을 비정규직에 대한 전술로 취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갈등과 균열을 부채질 할 수 있는, 즉 "손안대고 코푸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가 내 가족과 이웃이 함께 신자유주의 국가와 자본의 반민주적 차별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거대 노총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를 흐르고 있는 거대한 철학과 인식의 강물은 오히려 노동운동의 후퇴와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강화를 가져왔다.
 
결국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의 정수리에 해고의 칼날이 소리없이, 그리고 잔인하게 꽂히는 동안, 그리고 KTX, 코스콤, 이랜드의 투쟁이 고사되는 동안, 그래서, 그 투쟁의 끝과 함께 우리의 호흡도 멈추게되는 동안 정부는 가장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줄 알았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잊을만하면 독도문제, 파병문제 등이 터져주면서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과 우리의 정수리에 칼날이 꽂히는 소리는 더욱 더 들리지 않고 있다.
 
현직 대통령 이명박의 파시스트 소망은 실패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륭이 모두에게서 방치되는 한, 그리고 800만 비정규직들의 호흡이 우리의 동맥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광우병 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회적 죽음이 우리의 정수리로부터 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이 두렵다면 '우리'는 반성과 함께 보다 새로운 투쟁, 보다 강력한 연대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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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을 다시 생각한다(김원)

“건국 60년을 다시 생각한다”
 

김 원
(대안지식연구회)
 

광복절 혹은 건국절?
 
최근 정부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며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 구성과 관련사업 추진을 지시해 문제시되고 있다. 이 사업은 관 주도인데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을 건국절로 바꾸려는 뉴라이트 등 일부 움직임과 직결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8.15는 우리에게는 ‘광복’ 혹은 ‘해방된 날’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1945년 8.15이며, 1948년 8.15는 다른 의미이다. 48년은 남북한 분단정부가 가시화된 시점이며, 이를 법적으로 남북한이 정당화한 때다. 그래서 사람들도 1948년 8.15는 별로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4.3 항쟁 피해자와 가족들, 해방 전후사를 통해 가족이 헤어진 사람들 등에게 1948년 건국과 그 시기는 ‘잊고 싶은 상실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기억이란 매우 선택적이다. 처음 건국 60년 사업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 일부 뉴라이트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존재했지만, 하나의 문제제기 이상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꾼다든지, 또 다른 ‘과거사 전쟁’을 예고하는 움직임, 관제동원 움직임 등은 일련의 의혹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건국 60년이 보수정치세력과 지식사회에 의해 ‘기억’으로 불러 올려진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먼저 1948년 제헌의회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좌파정권 10년’, ‘읽어버린 10년’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10년간 지식사회와 정치적 세력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빼앗겼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우파-분단정권의 기원인 48년 건국의 기억을 다시 불러올림으로써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되찾고자 한다.
 
다음으로 이른바 386의 ‘삐뚤어진’ 역사관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이다. 정권교체이후 각종 위원회를 통해 지난 군부 파시즘 시기 은폐된 역사의 규명, 희생자와 가해자의 진상규명 등이 부족하지만 진행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가해자인 정부에 의해 진정한 의미의 진상 규명이 가능한가, 논쟁적인 사건들이 국가의 기억으로 전유되는 것은 아닌가 등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실제 보상 과정에서도 피해자나 관련자들의 응어리를 풀러주기보다,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망각과 침묵의 늪에 빠져있던 이들 기억을 불러온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현 정부와 뉴라이트론자들은 그간 10년의 과거사 논란은 좌파정권과 386세대의 ‘아비 죽이기’ 혹은 ‘왜곡된 국가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386 역사관의 ‘전면적인 수정’할 기치를 높이 들었다. 최근 발간된 <대안교과서>가 학술적 형태의 반응이라면, 건국 60년 사업은 ‘정부적 형태’의 조직화된 대응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건국 60년 사업은 현재적인 알리바이가 존재한다. 이명박 정권은 두 차례 선거를 통해 ‘좌파 정권 10년’, ‘잃어버린 10년’이 평가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대선 직후 인수위원회가 보인 마치 80년 ‘신군부’같은 태도를 비롯해서, 각급 행정기관에서 진행된 지난 시기 실시한 적이 없는 행정수반의 ‘국정철학 강연’, 이전 시기 공공기관 기관장에 대한 노골적인 사퇴 압력과 퇴진,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한국방송공사 사장 강제 퇴진 논란 등이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5-6월의 촛불시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대중들은 이명박 정권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한 것도 아니며, 다시 한국 사회를 10년 전으로 되돌리라고 이들을 지지한 것 역시 아니었다. 촛불시위와 지지층 이탈, 그리고 핵심 국책사업인 대운하 등이 당장 실시되기 어렵자, 보수세력은 방향을 다른 쪽으로 튼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거사를 둘러싼 전면적인 공세이다.
 
민주적 공론장으로서 역사 논쟁
 
나는 기존 현대사 해석에 대해 뉴라이트가 재논의를 하는 것 자체를 반대할 생각은 없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지닌 정치세력이나 지식인 집단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한국만은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68혁명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 40주년을 맞아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역사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자신과 다른 역사-해석을 일방적으로 ‘실패’ 혹은 ‘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들 보수세력은 그 누구보다도 열렬한 ‘시장주의자’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역사와 역사해석 역시 정당한 ‘경쟁’을 통해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경쟁의 정신’이 아닐까?
 
만일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하고 ‘민주적 공론장’으로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 정당한 태도이다. 그러나 매우 불행히도 현 현 정부의 건국 60년 사업은 서로간의 차이를 용인(容認)하는 똘레랑스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적과 아’라는 냉전적인 대립 구도 하에서 한쪽만의 역사 해석만을, 한쪽만이 강요하는 기억만을 내세우고 있다. 물론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거나 그 성과를 재해석할 수 있다. 다만, 이에 반하는 흐름을 전부 싸잡아서 ‘시대착오’, ‘좌파’ 등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또 다른 ‘마녀사냥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다.
특정한 역사와 그 안에 개인, 인물에 대해 일방통행적으로 실패 혹은 성공을 강조하는 것은 80년대 이후 전개된 한국 현대사 연구 성과를 일순간에 완전 무시하고 뭉개버리려는 시도에 다름이 없다. 386이란 특정 세대의 역사관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다만 냉전 시기 획일화된 현대사 인식에 반하는 해석들이 지속적으로 누적된 것이 민주화 이후 20년간 축적된 한국 현대사 연구다.
 
건국 60년이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해석이 아닌, 그 시대의 아픔, 고통, 피해, 희생 그리고 48년 이후 60여년을 살아온 다양한 한국인의 경험을 드러내고, 이것을 통해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바로 진정한 지적·도덕적인 헤게모니를 보수세력과 지식인들이 대중들로부터 얻고자 한다면, 상대의 역사인식을 인정하고 설득하려는 태도를 먼저 보여야 한다. 바로 민주적 공론장으로서 건국 60년 사업의 위치를 명확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미래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대학시절 한참 사법적 판단의 소재였던 <한국민중사>를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당시 글들은 비록 거칠지만 언젠가 승리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가정을 깔고 있지 않았나 싶다. 바로 운동을 위한 역사, 바꾸어 말하자면 역사 서술의 일정한 목적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 점이 이른바 뉴라이트론자들이 ‘386의 역사관’이라고 비판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또 다른 목적론을 ‘시대불가피론’이란 이름 하에 현재화 시키고 있다. 객관적 사실과 실증에 입각한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들은 박정희 체제와 근대화의 방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개인과 집단에 대한 분명한 태도, 즉 반대와 저항의 흐름은 그 자체로 근대화와 다가올 미래를 지체시키는 ‘지체요인’인 동시에 ‘역사적 반동’(historical reaction)으로 파악하고 있다. 저항세력의 주장은 당대 현실화될 수 없는 ‘자가당착적인’ 것인 동시에 미래를 퇴보시키는 ‘퇴영적인 당사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뉴라이트 역시 박정희 시기의 근대화와 다양한 민중의 희생과 탄압을 ‘특유의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끊임없이 정당화시키려는 ‘세련된 해석자’일 따름이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방식의 정당화를 통해 현재의 국면 - 이들이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과 ‘좌파 정권’의 부정과 실용주의에 입각한 부국강병 - 에서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선취하려는 ‘역사의 이용’(use of history)일 따름이다. 하지만 앞서 민중들의 파편적인 기억을 통해 뉴라이트 집단이 주장하는 불가피론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길은 경제성장 이후 민중의 삶과 자유가 보장된 미래인데, 현실은 전혀 그럴지 않다. 베트남 참전병들은 아직도 용병의 멍에와 숨겨야 할 수 밖에 없는 병마 그리고 기약 없는 명예회복을 기다리며, 기지촌 여성은 여전히 매매춘 여성 혹은 사회 하단에서 막일로 연명하고 있다. 또한 도시 하층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무질서, 무지, 혼란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회의 시각에 힘겨워 하며 하루 하루를 영위하고 하고 있다. 불확정적인 미래의 지속, 이것이 ‘뉴라이트 역사 인식의 딜레마’이다.
 
진정한 폭력은 공권력에 의한 물리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와 상상력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미래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뉴라이트 그룹에게 미래란 늘 현재를 지연시키는 자기 암시적 주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의 미래’는 지속될 수 없다. 근대화와 부국이라는 ‘하나의 미래’가 아니라 복수의 미래를 상상하고 그 속에서 현재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물결칠 때, 이제 박정희 시대와 뉴라이트의 미래는 종언을 고할 것이다. “그들의 미래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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