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erator
(가칭) 대안지식연구회 과수원
  • Control Panel
  • Write Post
지행소개         지행사람들         강좌&커리큘럼          자료실          언론보도          커뮤니티          일정          방명록          지행 홈페이지 

다시 '독재'를 생각한다(김원)

다시 '독재'를 생각한다



김 원(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민주주의 vs 독재


노무현 사망이후 민주주의, 독재 등 말이 등장하고 있다. '담론' 차원에서.

담론이라는 면에서 독재나 민주주의가 세력관계를 반영한 적이 오랜 되었는데, 좀 새삼스럽다.


그럼 '독재'란 무엇일까?

담론 수준에서 독재는 '군부지배', '일당-일인의 전횡적 통치', '억압적 통치' 등이 아닐까? 요즘 보수정당이나 일부에서 자주 쓰는 '소통의 부재'란 아마도 시민사회와 반대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부와 다수 여당이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좀 꼼꼼하게 살펴보자면, 이는 시민사회내 다양한 요구를 정당이나 정책을 통해 대변하지 못하는 '이익매개 기능'의 약화라고 해석 가능하다. 이는 곧바로 '정당정치의 미발전'으로 이어진다. 예전 말로 치자면, 민의를 대의제가 대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되돌이켜 보면 이전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기에는 소통이 잘 이루어졌나 질문하면 그 역시 아니다. 포플리즘적 통치에 기초한 정당제와 대의제의 약화는 2000년대 내내 지속된 현상이다. 그래서 최장집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고 비판했고, 시민들에게 지적인 충격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독재나 소통 결여란 문제가 제기될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자. MB정권은 이전 정권에 비해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사용이 잦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 등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 강력하다 등이 이를 보여주는 주된 현상들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 정권에도 사회운동 등에 대한 탄압은 존재했고, 억압적 국가기구도 작동했다. 불안정노동, 구조조정, 노사관계로드맵 등을 기억하면 된다. 다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잊을 뿐이다. 물론 억압적 국가기구 작동이 이전보다 노골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독재라고 부르는 근거는 아니다. 이는 '대안'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재를 부르는 순간, 그 대안은 민주주의가 되고, 대안-담론 수준의 민주주의는 정상적인 정당정치, 소통의 원활 등으로 좁혀진다. 다시 1987년 수준의 민주주의로 회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독재라는 담론을 사용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본질적으로 보면 모든 자본주의 국가와 정권은 독재이다. 반동적 독점자본의 정치적 테러독재 형태를 아주 예전에 파시즘이라 불렀듯이,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부르주아 독재이다. 다만 정권 형태의 차원에서 '누가 집권'했냐에 따라, 반동적 부르주아지냐 아니면 자유 부르주아지냐에 따라 그 형태상 차별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런 엄밀한 논의를 떠나서, 담론 수준에서 독재에 대항해 투쟁하자고 대중들에게 외치면,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할 것이고, 그 민주주의는 87년 제8차 개헌에서 규정한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즉 민주주의의 계급성이 아주 쉽게 망각된다는 것이다. 지금 운위되는 민주주의는 이른바 독점자본의 정치적 외피로서 민주주의이다. 그 외피에 상처를 내는 반동적 부르주아지들의 지배에 대항하자는 것이 현재 시점이다.

이 이야기를 하니, 문득 18년전 논쟁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1991년 5월 강경대 군의 테러 치사 사건이후 사회운동은 1달이 넘게 거리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다들 파쇼타도-민주주의를 외쳤지만, 문제는 대안이었다. 에피소드같은 논쟁이었지만, 어느 세력은 '파쇼 타도-민주주의 쟁취'를 외쳤다. 여기서 '민주주의가 무엇이냐?"란 문제가 떠올랐다. 그 안에서도 한편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를, 다른 한편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아니면 과도정부 슬로건을 외쳤다. 적어도 당시 NL이 주장했던 '국회해산-즉각 총선'은 대안이 아니므로, 노동자 권력을 위해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에 비해 2009년은 많이 후퇴한 셈이다. 물론 제헌권력, 국민소환 등이 제기되지만 아직은 논쟁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권력의 항상성



이렇게 긴 이야기를 내가 해버린 하나의 이유는 '독재' 란 담론이 지닌 자기 한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용하더라도 써야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인지되지 않았을 때, 민주주의 투쟁은 대안을 스스로 형성하지 못하고 소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억압적 국가기구', 이른바 공권력의 문제다. 일단 전제해야 하는 것은 현재 국가기구의 작동은 80년대적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 이른바 국가-자본관계에서 자본의 지배력이 전일화된 상황에서, 공권력의 동원은 과대성장한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은 자신의 장기적 정치이익 - 이른바 경제위기 극복이나 사회안정 등 - 을 위하여 공권력의 노골적인 사용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총자본과 국가간 이해의 수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MB정권은 자본분파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능력을 지녔기에, 공권력을 주로 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17년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 시절, 이른바 '이완된 독재' 혹은 '시민사회의 팽창' 등이 논의되며, 국가권력과 전면적인 투쟁인 '기동전'이 아닌, 시민사회내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포위하고 이들을 장악하는 진지전 논의가 '그람시'를 원용하며 사회운동에 들어왔다. 다만 그때는 그람시를 아주 잘 못 이해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쉽게 말해서 '국가=억압', '시민사회=헤게모니'라는 얼토당치 않은 말을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해석했다. 물론 그람시 소개서중에 그런 해석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람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늘 억압적이며, 최종 순간에 자본(총자본)을 방어하기 위해서 강제력을 준비하고 예비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이며 억압적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현재 억압적 국가기구의 작동은 '독재'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가 총자본의 장기적 정치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율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나타난 상황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국선언이 확대되는 와중에 '시민사회는 독재에 맞서고 있다'는 주장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민사회는 이념적인 면에서나, 조직적인 면에서 분화가 공고화된 상태이다. 지금 시국선언은 시민사회내 MB정권의 공권력의 과잉 사용과 시민사회내 이익매개 기능의 단절을 비판하며 나온 - 모두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대 반대연합이란 의미에서 -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독재와 소통의 부재라는 현실 진단은 매우 제한적이고 현재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대안을 스스로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안이 퇴영적인 만큼 설득력을 시민사회에서 좀 더 넓게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혹자는 87년 6월 이전을 회고하며, '좀 더 대중적인 슬로건'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별로 대중적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시민사회내 존재하는 대항세력의 입지를 좁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죽음 곁의 현상에 주목해 보자



추모정국에서 형성된 민주주의-독재 전선을 이동시켜야 한다. 그 이유는 현재 전선이 가진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에 그러하다.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지에 대해 대중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시 이 점에서 나는 죽음으로 형성된 추모정국의 생명력보다는, 금융위기 이후 형성되고 있는 대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죽음과 추모에서 한 발 떨어져서 추모 주위에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시간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지행네트워크


Trackback URL : http://jihaeng.net/blog/trackback/140

Leave a comment

인도산 고추와 한국의 야3당


이승원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원위원)


인도산 부트 졸로키아 고추


얼마 전 직장 일로 동남아 국가의 한 수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체류 마지막 날 지역단체의 초청으로 조촐한 저녁식사가 마련되었다. 식사 중 반찬으로 매운 고추로 만든 양념장과 식초에 저린 고추가 추가로 제공되었다. 각 국의 참석자들은 저마다 매운 음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양념장과 저린 고추를 즐겼고, 나도 “한국 사람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라는 말과 함께 저린 고추를 한 입 물었다. 헉! 내가 매운 음식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도 그랬지만, 역시 햇볕 강한 나라에서 재배된 고추라 그 매운 맛이 우리의 청양고추가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눈에서 눈물을 쏙 빼놨다. 타는 혀에도 불구하고 표정이야 어떻게든 감출 수 있었지만, 이미 벌겋게 상기된 눈 주위와 볼은 함께 한 참석자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할 수 밖에 없었다.


고추 하나로 웃고 즐기는 동안, 내 곁의 파키스탄 학자 한 분이 우리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모든 사람들이 고추를 즐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달리 잘살지 않으면 매운 고추를 잘 먹지를 못하는데 그 이유를 아느냐는 것이다. 출장던 방영된 ‘스파이스 루트’라는 향신료 관련 MBC 다큐를 보고 세계에서 가장 매운 고추는 인도산 ‘부트 졸로키아’로 그 매운 맛이 우리 청양고추의 100배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인도 등 남아시아인들은 우리가 고추장을 먹듯 고추, 후추, 식초, 새우젓갈 등을 섞은 ‘삼발’이라는 소스를 일상에서 즐긴다고 한다. 당일 저녁 저린 고추와 함께 우리가 맛본 양념장이 바로 ‘삼발’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식 때문에 우리가 파키스탄 학자의 질문에 당황하며 답을 말하지 못할 때, 그 분은 웃으며 짧게 답을 이야기 해주었다.


“물 때문입니다.”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아시아, 특히 남아시아에서 식수는 대단히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물을 과소비하게 되는 고추를 식수난에 허덕이는 서민들이 즐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왜 그 답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남아시아의 서민들에게 지천에 깔린 고추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식수가 안정적으로 제공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것이 어디 고추뿐이고, 그것이 어디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만 발생하는 일이겠는가. 짧은 여정 속에서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기억이었다.


고추가 되버린 민주주의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김치만큼이나 이젠 생활화된 언어이다.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를 떠나서는 자신의 정당성을 찾기가 힘들다. 그것이 법의 형태이든, 관습의 형태이든, 혹은 가치와 의식의 형태이든 간에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자기 것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외칠수록 조갈(燥渴)을 더 느끼고 해갈(解渴)을 갈망한다. 마치 고추를 먹으면 먹을수록 물을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점점 민주주의는 사치스러운 향신료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적 제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을 하고, 호소를 하지만, 이제 그 저항과 호소는 오히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하루일당보다 못한 것이 되어 버리고 있다. 생존을 위한 일상의 노동을 투쟁과 정치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혹독한 현실에서 하루 종일의 고단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자신의 제 권리를 찾기 위해 또 다시 거리의 정치에 자신의 육체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차라리 노동과 정치의 투잡(Two jobs)을 뛰는 사람이야 일자리와 삶의 공간에서 내쫓겨 일당조차 포기한 채 설움 반 분노 반으로 ‘투쟁’을 해야 하는 이들에 비하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생명의 물’인줄 알았고, 민주주의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 희망을 품었던 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점차 매운 고추가 되고 있다. 그 소중했던 민주주의가 이젠 너무 힘들다.


지난 4월 말 보권선거 이후 승리로 환호한 정치세력들은 일면 황홀경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현재의 이명박 정권이라면 자다가도 이를 가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신당은 저마다 선거승리 이후 反이명박 전선의 중심이자 향후 대안적 집권세력이 될 수 있다는 황홀경 속에서 현재의 반민주․반서민적 장벽을 깨기 위해 ‘단결’과 ‘연대’를 말하고 있다. 자신들이 서민들의 ‘조갈’을 ‘해갈’할 수 있는, 최소한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아리수’급 정도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타른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과 같았던 민주주의를 매운 고추로 만들어버린 ‘조갈’의 원인제공자들이라는 것은 반성하고 있지 못하다. 민주당은 자신들의 ‘신자유주의적 결과물’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또한 2004년 국민들이 만들어준 성과를 분열로 만들어버린 것에 대해 서로를 성토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을 ‘정당’과 ‘선거’라는 향신료로 만들어버린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수식어가 붙은 야3당의 역할


당장 다음 달 6월 임시국회가 시작되면 ‘미디어법’을 둘러싸고 정국이 긴장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무서움은 7월부터 노동시장 대란을 불러일으킬 비정규직 악법의 개악에 숨어잇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신당이 국민들이 미디어법과 비정규직법 개악에 분노하여 ‘생업’을 접고 거리로 나오기를 손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국민을, 서민을, 약자를 위하는 정치세력이라면 제2의 촛불을 기다리거나 기대해서는 안된다. 국민들은 무더위를 이길 수 있는 상큼한 일자리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시원한 여름휴가를 즐기기 위해 그들을 지지한 것이고, 지난 보궐선거의 결과를 만들어 준 것이다. 국민들은 이미 삶의 현장에서 온 몸으로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 현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분노는 그 정도로 충분하다. 야3당(여기서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을 굳이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 굳이 할 일이 아니다. 야3당은 국민들이 거리투쟁이 아니라 다가오는 여름부터 일자리와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도록 지금부터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민주’, ‘노동’, ‘진보’라는 수식어가 붙은 야3당은 새로운 연대의 전형을 만들어 민주주의를 조갈(燥渴)의 향신료가 아닌 해갈(解渴)의 식수(食水)로 다시 바꿔야 한다. 자신들의 게으름 혹은 차이로 인해 그 전형과 변화가 실패한다면, 결과는 생각보다 무섭다. 청계천과 ‘아리수’ 이상으로 4대강 정비사업은 국민들에게 해갈을 가장한 독수(毒水)로 퍼질 것이다. 국민들은 독수인지 생수인지 구별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삶이 힘들고 목이 타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대의 전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해갈을 위한 희망의 시작일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지행네트워크


Trackback URL : http://jihaeng.net/blog/trackback/139

Leave a comment

4·29 재보선의 승자와 패자



이 영 제(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이명박 정권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권자들이 4·29 재·보궐 선거에서 “총탄대신 투표로” 5대0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 한나라당의 참패로 평가하고 있는 이번 선거의 결과가 경제부흥에 열광했던 이명박 대통령 지지자들의 이탈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지난 대선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해 무당파를 형성했던 유권자들이 투표소로 복귀한 것인지를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5대0’이라는 명확한 결과와 다르게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전주의 2개 선거구는 애초부터 한나라당과 관계없는 지역정당의 집안싸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고 경주에서의 선거도 소위 ‘친이’와 ‘친박’이라는 한 지붕 두 가족의 자존심 싸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현 정권 또는 집권 여당에 대한 평가와는 거리가 있는 3곳을 제외하면, 이번 선거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부평과 울산 2곳에 불과하다.


 진보정치 1번지로 불렸던 울산에서는 ‘분열 당한 민주노동당’과 ‘분화한 진보신당’의 후보단일화를 둘러싼 치열한 샅바싸움과 진보정당과 보수정당간이 경쟁이라는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예선에서 조승수 전의원과 진보신당을 심판하는데 모든 자원을 동원했다. 분열은 잘못이며, 다시 통합을 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후보가 단일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진보신당은 원외전당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돌파구로써 조승수 전 의원의 당선을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특히 민주노동당에게 분열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조승수 전 의원은 진보신당에게는 분화의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후보 단일화 과정은 보수정당과의 경쟁보다 치열했다. 선거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아쉽게도 양자의 승부는 뒤로 미루어 졌다. 결과적으로 진보신당은 원내 진출에 성공함으로써 진보정당 원내진출 5년 만에 복수 진보정당 시대를 열었다.


 울산에서의 승리로 유일 진보정당으로서의 위상을 찾고자 했던 기획은 실패했지만 민주노동당은 호남에서 울산에서의 승리 이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민주당 텃밭인 호남에서 민주당을 여유있게 누르고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이 당선된 것이다. 호남에서의 지속적인 선전은 민주당을 대체할 ‘대안 정치세력’으로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을 확보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가장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것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5곳의 선거구 중 부평 1곳에서만 자당의 후보를 당선시켰다. 문제는 친MB후보로도 손색이 없는 FTA의 첨병을 소위 ‘반MB 후보’로 공천함으로써 국민들의 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 정서를 희화화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반MB연대’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민주노동당이 가장 중요한 선거구로 꼽혔던 부평에서 단일화를 거부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반MB연대’의 최대 수혜자로서 민주당의 위상을 스스로 위태롭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민주당에게 보다 뼈아픈 것은 호남이라는 텃밭에서 진행된 광역의원선거와 기초의원선거에서 민주노동당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호남에서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철회가 민주노동당 및 무소속의 선전으로 외화 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특이한 것은 향후 선거까지를 관통하는 큰 흐름을 형성하려 했던 소위 ‘반MB 연대’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과 같이 야권과 시민사회진영이 일찌감치 추진해 온 ‘반 MB연대’는 이번 재보궐 선거에 어떠한 성과도 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체조차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특히 부평에서 전 한미FTA국내대책본부장을 지낸 후보가 민주당에서 공천되었고, 울산에서는 ‘분열당한 민노당’과 ‘분화한 진보신당’의 샅바싸움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MB 진영’에서 이와 관련된 제대로 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반MB연대를 추진했던 세력들의 ‘이율배반적’ 침묵과 소극적 대응은 비판적 지지의 연장선에 있는 ‘반MB연대’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지행네트워크


Trackback URL : http://jihaeng.net/blog/trackback/138

Comments List

  1. dd 2009/05/29 23:55 # M/D Reply Permalink

    진짜 여기 글들 너무 뻔하다..솔직히 이 정도 수준은 좀 똑똑한 좌파 학부생도 다 쓰는거자너. 이럴거면 뭐하러 대안지식 어쩌고 이름 달았는지 모르겠다. 댓글도 없고 rss에서도 이제 지워야지..

    1. 대마왕 2009/06/02 15:11 # M/D Permalink

      그렇죠? 사람들이 좀 친절하지 못해요. 이름은 그렇게 해보겠다고 지은 거니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rss에서 지웠음 이 댓글은 보시려나...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 12 : Next »

archive

Bookmarks

Powered by TextCube Skin by PureHolic